1박 2일 여행 1일차, 무안 초의선사 유적지 "2024. 9. 28."
▶ 여행 1일차 목포 유달산과 해상케이블카를 구경하고 무안군으로 넘어와 초의선사(艸衣禪師) 유적지를 찾았다
유적지 입구에 가니 관리실에서 아가씨가 나와 해설사 필요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나는 부부 2명인데도 해설사를 붙여주느냐고 의아해 하면서 묻자 아가씨가 원하시면 붙여 드린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초의선사 유적지 모든 곳을 다 둘러보고 해설사 설명없이는 들어가기 힘든 기념전시관과 조선차 역사박물관도 들어가 보면서 초의선사 생애에 거쳐간 매월당 김시습, 추사 김정희 관련사실 등 초의선사의 차문화와 사상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얻었다
해설을 들으면서 알게된 사실이지만 우리가 울산에서 왔다고 하니 자신의 고향이 울산이고 울산여고를 졸업했고 퇴직 후 해설사를 한다면서 나이 70에 이런 일을 하니 좋다면서 하나라도 더 많은 것을 알려 주려고 한 그분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 초의선사 탄생지의 대각문(大覺門), 향교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들어갈 때는 우측, 나올 때는 좌측으로 나와야 한다
대각문
초의선사 유적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문이다. 대각이란 크게 깨닫는다는 뜻이니 이곳에 온 사람들은 모두 큰 깨달음을 얻으라는 의미이다. '대각'이라는 이름은 초의선사가 조선 헌종 임금에게 받은 사호(賜號)인 대각등계보제존자 초의대선사(大覺登階普濟尊者 艸衣大禪師)에서 따왔다.
본래 사찰에서는 입구에 일주문을 세우지만 이곳에는 초의선사의 사당이 있어 삼문(三門)을 세웠다 가운데 큰 문 양옆으로 작은 문이 있는데, 동문은 들어가는 문, 서문은 나오는 문이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왕산(旺山) 봉수대가 한눈에 들어 온다.
▶ 초의선사의 생애
대각등계보제존자 초의대선사(大覺登階普濟尊者 艸衣大禪師)는 조선 정조 10년(1786) 4월 5일에 무안군 왕산리에서 태어났다. 법명은 의순(意洵)이며 자는 중부(中孚)이며 초의(艸衣)는 법호(法號)이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나주시 다도면 운흥사로 찾아가 벽봉 민성 스님께 의지해서 출가하였다.
이곳에서 불경을 익히고, 열 아홉살(1804)이 되던 해에 영암의 월출산에 올라 갔다가 산세가 기이하고 아름다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문득 산 봉우리에서 떠오르는 둥근달을 보고 크게 깨우친 바 있어 가슴에 맺힌 것이 시원하게 풀리니 가는 곳마다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뒤 해남 대흥사에서 완호(대흥사 제9대 강사) 스님을 뵙고 구족계를 받았으며 초의라는 호도 이때 받았다.
스님은 대흥사를 떠나지 않고 경전을 배우고 범자를 익혀 경전에 통하고 또한 탱화를 잘 그려서 당대 오도자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단청도 잘하여 조사 스님들을 모신 대광명전과 보련각을 짓고 손수 단청을 해서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선의여가에 익힌 서법은 일가를 이루어 뛰어났으며 특히 예서를 잘 쓰셨다.
39세에는 일지암을 중건하고 수행처로 삼았다. 스님은 이곳에서 선의 논지를 밝힌 초의선과와 선문사변만어를 저술했고 차(茶)문화 부흥을 위하여 동다송과 다신전을 펴냈으며 이밖에도 많은 시서와 문집을 남겼다.
55세(1840)때에는 헌종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 초의대선사라는 사호를 받았다. 줄곧 일지암에 주석하시던 중 하루밤에는 몸져 누웠다가 시자를 불러 부축을 받아 일어나 서쪽을 향해서 가부좌를 하고 홀연이 입적하니 그때 나이는 81세요 법랍은 65세로 고종 3년 8월 2일이다.
초의대선사는 당시 배불정책으로 배척받던 시절에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해거 홍현주, 이제 권돈인 등 사대부들과 깊은 교분을 나웠으며 조선 후기 한국 문화사에 큰 업적을 남기신 선승이다.
▲ 초의선사 유적지 안내도, 좌측 대각문으로 올라 우측으로 돌아 초의생가로 내려오면서 구경하면 된다
▲ 대각문을 들어서면 좌·우측으로 차밭이 있다
▲ 초의선사 동상 옆에 있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
정좌처다반향초(靜坐處茶半香初), 묘용시수류화개(妙用時水流花開)
고요히 앉아 있는 곳에 차는 반쯤 남았는데 향기는 처음과 같고 (靜坐處茶半香初)
묘한 작용이 있을 때에 물은 흐르고 꽃은 핀다 (妙用時水流花開)라는 뜻이다. 정좌처는 다삼매(茶三昧)의 자리요. 묘용시는 선(禪)의 삼매경(三昧境)이다. 즉 선과 차가 한경지라는 말이다
▲ 고불미생전 응연일상원(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석가유미회 가섭기능전(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은 옛 부처나기도 전에 의젓한 일원상, 석가도 모른다 했거늘 가섭이 어찌 전하랴는 계송비
▲ 명선(茗禪)은 초의선사에게 추사 김정희가 차를 선물 받고 그 보답으로 차와 선이 한경지라는 뜻으로 명선이라는 글씨를 크게 대자로 써서 보내 주었다. 서체는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의 서체를 본받았으며, 병증에 썼다고 하여 병거사(病居士)라고 되어 있다
▲ 추사 김정희의 글씨 옆에 초의선사 동상이 있다.
초의선사 동상은 노년의 모습을 그린 영정을 보고 조성하였다. 선사는 출가 후 해남 대흥사에서 일생을 보냈다. 서른에 한양으로 올라가 추사 김정희, 해거 홍현주, 자하 신위 같은 뛰어난 명사들을 만나 교분을 맺은 뒤 일생동안 교유했다, 선풍(禪風)을 진작시켜 대선사로 추앙받았고, 당대 최고 종사의 비위에 올랐다. 한국 다도를 정립한 다성(茶聖)이면서도 많은 시문을 남겨 조선을 대표하는 시승으로 꼽힌다. 동상은 조각가 노정용이 5년에 걸쳐 조성했다. 한국다도협회 정상구 이사장이 시주를 하고 서삼석 무안군수가 세웠다.
▲ 초의선사 동상을 지나면 고증을 거쳐 복원한 일지암이 있다.
이곳 일지암은 초의선사가 평생 수행하다 열반한 해남 대흥사 일지암을 복원하였다. 초의선사는 일지암에서 동다승과 다신전 등 많은 문집을 저술하였으며, 현판 글씨는 다산 정약용의 아들 유산 정학연의 글씨다
▲ 문화해설사가 없었다면 들어가지 않았을 기념전시관을 둘러보았다
기념전시관은 초의선사의 일대기를 그대로 설명해 놓았다
![]() |
![]() |
![]() |
![]() |
▲ 추사 김정희 글씨인 명선
![]() |
![]() |
▲ 추사 김정희의 정좌처다반향초(靜坐處茶半香初), 묘용시수류화개(妙用時水流花開)
▲ 뒤가 초의선사의 동상을 모셔놓도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다성사로 올라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상은 청동으로 만들었고, 영정은 제자인 소치 허련이 선사의 80세의 모습을 묘사했다고 한다
입구에는 제1`3대 초의대종사비와 대각등계보제존자 초의대종사비가 나란히 있다
대종사는 제1대 서산대사에서 출발하여 초의선사가 제13대 대종사였으며, 이후에는 대종사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대각등계보제존자는 초의선사가 55세(1840) 되던 해에 조선 헌종으로부터 받은 사호라고 하는데 왕사나 국사제도가 폐지된 조선시대에 임금으로부터 죽은 뒤에 시호(諡號)를 받은 일은 있었지만 사호(賜號)를 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 다성사 앞에서 우측으로 돌아가면 금오초당과 조선차 역사박물관을 만난다.
이곳에서 등산로를 따르면 정상에서 멋진 곳을 만난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시간이 없어 등산로는 가지 못했다
좌측에 초의선사와의 교분으로 인한 매월당 김시습의 금오초당 있다. 조선 초 시인이자 문장가로 알려진 매월당 김시습의 다실을 고증을 거쳐 복원하였다고 한다
우측은 조선차 역사박문관은 조선시대 차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전시해 놓았다.
▲ 조선 차역사 박물관
조선시대 차 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차 도구를 조선 이전과 조선 전·중·후기 순서로 전시하고, 중궁의 차 도구와 조선시대 차 문화를 기록한 도서를 선보인다. 각 진열관에는 차 문화사를 시대별로 한눈에 알 수 있는 연대표를 전시했다. 우리나라 차 산지와 시대별 차 문화, 초의선사가 차를 만들던 제다법 및 차를 달이거나 마시던 행다법을 동영상으로 소개한다. 조선시대 차의 종류, 각종 문헌에 나타난 차의 종류 및 문헌 이름을 정리하고 중국 및 일본과의 차 문화 교류를 중국 사신과 조선통신사의 여정을 담은 지도를 통해 상세히 소개한다. 동갑내기인 초의선사와 추가 김정희의 차를 통한 교유와 우의를 확인할 수 있다.
박물관은 앞면 5칸에 옆면 3칸의 정자식 건물이다. 경사를 그대로 살린 땅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우물마루를 놓고 건물을 올렸다. 마루가 높아 통풍이 잘될 뿐 아니라 그 아래 그늘에서 쉴수도 있다. 건물 면적 52평(171㎡)은 선사가 「동다송」을 저술한 나이를 상징한다.
처마를 받치는 부재인 공포는 차 꽃을 3종류로 디자인해 올렸다. 출입문에는 조선시대 차 문화를 보여주는 그림을 조각하면서 아래쪽에는 차 꽃꽃이 그림을 새겨 놓았다.
건물을 지을때도 초의선사와 관련된 것을 표현한 건물이라는 것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 조선 차역사 박물관에서 바라본 초의선원과 보제루
▲ 화장실인 청심재
청심재는 맑은 마음을 기린다는 뜻으로 지은 화장실이다
▲ 청심재 위로 조선 차역사 박물관
▲ 용호백로정(容湖白鷺亭)
서울 용산에 있었다는 추가 김정희의 정자 용호백로정을 이곳에 복원하였다. 용호는 용산의 옛 지명이고, 백로정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서 백로가 노니는 모습을 본다하여 붙인 이름이다. 정자는 기록으로만 전하고 정확하게 어디에 있었는는 알 수 없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두 해나 머물면서 동갑내기 김정희와 함께 시를 짓고 청담(淸談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야말로 금란지교(金蘭之交)였다. 이곳에 드나들던 선비들은 초의선사를 금신불(金身佛) 김정희를 옥국선(玉局仙)이라고 입을 모았다.
정자는 남북으로 방을 하나씩 두고, 가운데에 우물마루를 낸 구조이다. 마루 위에서 연못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마루 한 칸을 더 내어 연못 위에 두었다. 허공을 담아내는 정자의 공간미를 한껏 발휘하고 있다. 여백의 미(美)이자 자연을 마음껏 품을 수 있도록 툭 터진 공간의 허허로움이다.
초의선사와 김정희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공간인 용호백로정에서 세속을 초월한 사귐인 방외청교(方外淸交)를 나누었다. 현판은 초의선사의 글씨다
※ 옥곡선은 중국 북송(960~1127) 때 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소동파(蘇東坡)의 별칭. 소동파가 제사를 맡은 관직인 옥국(玉局)을 지낸 데서 유래
▲ 용호백로정의 연못
▲ 초의선원 - 이곳 선원도 초의선사 일대기가 다 들어간 건물이였다
"차로써 몸가짐을 다스리고, 선으로는 깨달음을 얻는다."
초의선사의 차 철학, 명선(茗禪)이다. 다도(茶道)와 찬선(參禪)을 수행한다는 뜻이다. 초의선원은 특별히 참선과 다도 수련을 위해 지은 목조 건물로 앞면 7칸, 옆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1층은 선방, 2층은 다실이다. 밖에서 보면 1층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2층이 되는 중층구조이다.
1층은 인간 세상, 2층은 하늘나라를 의미한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33천(天)의 하늘나라로 오른다는 의미로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열다섯살에 출가해 여든한 살에 입적한 초의선사의 승려 생활에서 전환점이 된 나이가 건물 곳곳에 반영돼 그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면적 81평(267㎡)은 속세의 삶 81세에 맞춰졌고, 바같 기둥 높이는 출가한 나이를 의미하는 15자(1자는 30.3㎝) 안 기둥 높이는 월출산에서 깨달음을 얻은 나이를 상징하는 19자이다. 바닥에서 도리(서까래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나무)까지 높이는 다산 정약용을 만나 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던 24세를 의미하는 24자이다.
출입문은 초의선사가 승려가 된 햇수인 법랍을 상징하는 65짝 2층 창호는 조선 헌종 임금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 초의대선사'라는 호를 받았던 나이를 나타내는 55짝으로 하였다. 출입문에는 초의선사의 생애를 돋을 새김했다. 정면 중앙의 초의문에는 선사의 생애 중 중요한 일을 4짝에 새기고 왼편 8짝에는 그의 생애를 여덟 기간으로 나누어 조각하였다.
오른쪽 다산문과 추사문에는 다산 정약용, 추가 김정희와 얽힌 일화를 각각 새겼다. 뒷면에는 '한국의 다경(茶經)이라 할 수 있는 차 전문서 동다송(東茶頌) 전문, 선비들과 세속을 초월해 사귀거나 고향을 돌아보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모든 문의 아래쪽 마름궁창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하던 전통 차 도구들을 조각하였다
▲ 초의선사 생가
초의선사 생가는 당시 시대를 상상해 복원한 것이다. 선사의 시 '귀고향'에 따르면 이미 생전에 폐허가 되었고 가까운 형제의 후손들이 남아 있었다. 복원된 생가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의 초가삼간이다. 선사는 열다섯 살 때까지 이곳에 살다 나주 운흥사로 출가했다.이곳은 임진왜란 때 나주에서 피난을 온 선사의 6대조가 처음 정착한 곳으로 승달산(僧達山)에서 유달산을 향해 뻗어 나가는 중간 지점에 있는 왕산(旺山) 자락이다
빼어난 기운을 간직한 왕산 봉우리에는 봉화대가 있고, 그 아래에 작은 암자 터가 있다. 암자에는 운흥사에서 온 스님이 기거하였고 선사는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출가의 꿈을 가졌다
▲ 초의선사 생가 좌측에 고향에 돌아와서라는 '귀고향(歸故鄕)' 시비가 있다
▲ 보제루(普濟樓)
초의선사의 차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의 보제는 조선 헌종 임금이 초의선사에게 내려 준 호인 대각등계보제존자 초의대선사에서 따왔다.
초의선사 탄생 222주년을 기념하여 1, 2층을 합한 면적이 222평(734㎡)이 되게 지었다. 초의차나 초의병차를 만들고 초의선사의 행다법을 배울 수 있다. 우리 전통 예절과 다양한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1층은 전시회, 강연회, 음악회 등의 각종 행사장과 다양한 공간으로 활용된다. 2층 온돌방에서는 다도와 절하는 예절법, 한복 입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1, 2층 모두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이고, 각 칸은 크기가 다르다. 내부는 한 공간으로 되어 있고, 천장이 높다 특히 1층 천장은 높이가 30자(9m)에 달한다. 마루에는 초의선사 영정을 봉안했다
보제루를 마지막으로 초의선사의 일대기를 공부하고 대각문으로 나왔으며, 울산이 고향인 해설사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고향에 오시면 꼭 연락하시라고 연락처를 주고받고 헤어졌다
☞ 무안에서 뻘낚지로 저녁을 먹고 하루 유하였다. 내일은 영광으로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