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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제2석굴암, 도담삼봉, 탄금대』구경 "2021. 7. 1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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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제2석굴암, 도담삼봉, 탄금대』구경 "2021. 7. 15."

지리산 독사 2021. 7. 20. 13:24

▲ 제2석굴암 주차장에 있는 군위 여행 안내도

 

    오늘은 청주에 사는 큰아들 집에 가는 날이다.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큰아들 기숙사, 아들과 의논할 일이 있어 코로나19 시국이라도 할 수 없이 1박 2일로 올라가게 되었다. 아들 회사 퇴근시간 맞추어 충주에 가면되니 올라가면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군위 제2석굴암, 멀리서 보고 지나만 간 단양 도담삼봉과 석굴,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신립장군과 8천여 명의 혼이 깃든 충주 탄금대를 중전마마와 같이 구경하기로 했다

울산에서 출발하여 석굴암 입구에 도착하니 12시였다. 유일하게 영업을 하는 시골식당에서 들깨칼국수로 점심을 해결하고 구경을 했다 

 

 

▲ 주차장을 나서면서 바라본 철망이 석굴암 입구 상가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다수 식당이 영업을 하지 않았다

    좌측에 보이는 암벽 아래에 석굴암이 있다

 

▲ 상가를 지나가자 우측으로 큰 암벽이 나온다

    암벽 좌측에 제2석굴암이 있다

 

▲ 소나무 숲 뒤로 전통문회교육원이 보인다

    작은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가면 석굴암을 만날 수 있다

 

▲ 전통문화교육원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 한 명 없고 너무 조용하다

 

▲ 법종루와 광명선원인데 출입금지라고 안내표지판이 있어 들어가지는 않았다

 

▲ 팔공산석굴암중창공덕사적비

 

▲ 군위 삼존석굴 석조비로자나불좌상(軍威 三尊石窟 石造毘盧遮那佛坐像)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8호인 군위 삼존석굴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삼존석불이 모셔진 이후인 9세기 경에 만들어졌다. 당시에 유행하던 신라 비로자나불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불상의 변천과 신앙 추이를 확인할 수 있다. 불상은 결가부좌를 하고 통견식의 법의를 입고 있다. 양쪽 어깨에 법의가 조금씩 걸쳐져 있어 앞가슴이 넓게 드러나 있다. 두 팔을 타고 내려온 옷 주름은 두 무릎에서 다시 물결무늬를 만들고 있다. 수인은 지권인이며 목에는 삼도가 있다. 두 뺨은 풍만하며 귀가 길게 늘어져 있고, 머리는 소라 껍데기처럼 말린 모양이며, 육계는 편평하다. 원래는 파괴된 대좌와 함께 지금의 위치에서 약 30m 불쪽에 있었으나 1990년 대웅전을 늘려 지으며 대좌와 불단을 새로 만들어 옮겼다.

◎ 결가부좌 : 부처님이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통견 : 가사를 입는 방법의 하나로 양 어깨를 모두 덮는 형태

수인 : 불상이나 보살의 서원을 나타내는 손의 모양

육계 : 부처의 정수리에 상투처럼 우뚝 솟아 오른 혹과 같은 모양

대좌 : 불상을 안치하는 대

 

▲ 비로전과 군위 삼존석굴 모전석탑, 뒤로 제2석굴암이다.

 

    팔공산 석굴암에는 북쪽 천연절벽의 자연석굴에 모셔져 있는 군위 아미타여래삼존석굴(국보 제109호), 석조비로자나불(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8호), 모전석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1호)을 비롯해 석탑재, 건축용 석재 등이 보존되어 있다. 또 비로전, 산신각, 요사채, 선원 등의 건물들도 있다. 경내 중심 법당인 비로전은 1991년 동쪽을 향하게 건립되었고, 그 앞에 모전석탑이 있다. 모전석탑은 본래 삼층이었으나 탑 위에 자라던 소나무가 태풍으로 탑과 함께 무너져 1947년 지금과 같이 복원하였다.

 

▲ 삼존 석굴 주변 수습 부재

    현재 팔공산 석굴암이라고 부르는 이름은 1990년대에 세운 사찰의 명칭이다. 과거 절이 있었던 터에 대한 명칭이 나타내는 문헌이 없어 남산리 사지(寺地)로 불리고 있다. 여기에 있는 부재들은 절이 있던 구역 내에서 발견되었다. 주춧돌 4장, 돌을 네모반듯하게 다듬은 것 8장, 바닥돌로 생각되는 돌 1장 등 총 28장의 손질한 돌이다.

석탑재는 모전석탑의 바닥돌이며 헐고 손보아 조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대신하면서 기존 부재를 별도로 모아 두었다. 불상을 올려 놓는 좌대에서 나온 조각은 총 2점으로 네모반듯한 대의 일부이다. 주춧돌은 총 4장이고, 동그란 형태로 다듬어졌다. 문짝을 여닫을 때 문짝이 달려 있게 하는 돌 2장은 모전석탑을 발굴하여 조사할 때 발견되었다. 내부 모서리에는 각각 지름 6.5~11cm의 둥근 모양의 홈이 파여 있는데 문기둥을 끼웠던 홈으로 추정한다. 

 

▲ 군위 삼존석굴 모전석탑과 석굴암

 

 

▲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

    석굴은 국보 제109호로 거대한 천연절벽 자연동굴안에 삼존불을 보셨는데 석굴입구는 둥근 모양이고, 내부 바닥은 네모지게 반듯한 모양으로 평평하다. 천장은 활등이나 반달처럼 굽은 모양이다.

석굴 안에는 중앙에 아미타불, 왼쪽에 관세음보살,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을 벽면에 붙여서 모셔 놓았다.

 

▲ 작은 다리를 건너가면 우측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지만 문화재 보호 때문에 철문이 굳게 닫혀 있다

 

▲ 산에 다니면서 군위 제2석굴암을 한 번 가봐야지 하고 생각은 했었지만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 충주에 가면서 잠시 들러 이렇게 구경을 하게 되었다.

 

▲ 군위 제2석굴암 옆에 있는 양산서원

    이 서원은 1786년 정조 10년에 설립된 지방교육기관이며, 성현을 존숭하던 곳이라 한다

 

▼ 양산서원을 구경하고 나니 하늘이 어두워지고 금방이라고 비가 쏳아질 것 같았다.

    제2석굴암에서 출발하여 단양 도담삼봉으로 가는 도중 비가 많이 내렸다.

    산에 다니면서도 지나만 갔지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은 도담삼봉을 들어가 보기 위해 빗속을 달려 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말이 있듯이 도착하니 비는 계속 오고 코로나19 때문인지는 몰라도 유람선도 황포돛배도 운행하지 않아, 그냥 빗속에 사진 한 장만 남겼고, 주차비 3,000원을 내고 여기까지 왔으니 석문은 갔다 오기로 했다 

 

도담삼봉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44호인 도담삼봉은 남한강이 크게 S자로 휘돌아가면서 강 가운데에 봉우리 세 개가 섬처럼 떠 있어 '삼봉'이라고 했고, 섬이 있는 호수 같다고 하여 '도담'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남한강 물줄기가 만들어낸 최고의 명장면이 아닐 수 없다.

도담삼봉은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이 유년시절을 보낸 곳으로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할 만큼 도담삼봉의 아름다움에 뺘졌다고 전해진다.

 

삼봉 정도전 이야기

비가 많이 내려 홍수가 난 어느날, 강원도 정선군에 있던 도담삼봉이 '넘실넘실' 단양으로 떠내려 왔고 이에 정선군은 "원래 우리 것이니 매년 세금을 내라"고 하였고 정도전은 "우리가 삼봉을 정선에서 떠내려 오라 한 것도 아니요.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으니 도로 가져가십시오"라고 하였다.

슬기롭게 대처한 어린 정도전 덕분에 그 뒤로 세금을 내지 않게 되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 석문으로 올라가면서 내려다 본 도담삼봉

 

▲ 단양 석문

    명승 제45호인 단양 석문은 단양팔경의 하나로 자연이 만들어낸 구름다리 모양의 거대한 돌기둥이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아주 오래 전에 석회동굴이 무너진 후 동굴 천장의 일부가 남아 지금의 구름다리 모양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규모가 동양에서 제일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문의 모양 그것만으로도 아름답지만 이것을 통해 바라보는 남한강과 건너편 마을의 모습도 마치 액자에 담긴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아름답다. 석문의 왼쪽 아랫부분에는 작은 동굴이 있는데 옛날에 하늘나라에서 물을 길러 내려왔다가 비녀를 잃어버린 마고할미가 이곳에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 도담삼봉과 석문을 구경하고 빗속을 뚫고 충주 탄금대로 향했다

    충주 볼거리 중에 탄금대로 정한 것은 아들 기숙사가 있는 곳이 가까웠기 때문이였다

 

▲ 탄금대 주차장에 도착하니 여전히 비가 내렸고, 구경하러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도착 전 바람이 많이 불었는지 도로에 나뭇가지와 낙엽이 많이 떨어져 있었으며, 주변 소나무와 참나무가 많이 뿌러져 있었다. 비가 와서 바로 아들 숙소로 가려니 퇴근전이라 그냥 차에 앉아서 기다렸는데 비가 그치고 이슬비만 조금 내려 우산을 쓰고 간단하게 구경하게 되었다.

 

충주 탄금대(명승 제42호)

탄금대는 해발 108m의 야트막한 산(大門山)으로 남한강 상류와 달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으며 경관이 아름다워 2008년 명승 제42호로 지정되었으며, 신라 551년(진흥왕12) 가야국에서 귀화한 악사 우륵이 이곳에서 금(琴)을 탔다는 것에서 탄금대(彈琴臺)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우륵선생은 원래 가야국 사람이였는데 신라 진흥왕이 가야지역을 차지한 후 사민정책에 따라 충주로 이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조선시대 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시 신립장군은 탄금대에서 8천여명의 병사들과 배수진을 치고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와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옛 전쟁터이기도 하다

 

탄금대에는 신립의 충의심을 기리기 위해 군수 김용은이 건립하고 육당 최남선이 찬한 탄금비가 있으며 또 1955년에 건립된 충혼탑과 항일 시인 권태응 선생의 감자꽃노래비, 1976년에 건립된 탄금정 등과 악성우륵선생추모비, 신립장군 순절비, 조웅장군기적비 등이 함께 있다.

 

▲ 탄금대 주차장에서 바라본 하늘로, 저 멀리는 하늘이 열리는데 이곳은 아직 이슬비가 내린다

 

▲ 탄금대에 있는 충혼탑은 1955년 11월에 대한민국 상이군경 용사회 충청북도 충주 분회와 대한민국 제대 장병 보도회(재향군인회)에서 광복이후 전사한 충주, 중원지역의 장병과 경찰관, 군무원, 군노무자의 넋을 추모하고자 세운 탑으로 2020년 1월 현재 1,930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매년 6울 6일 이곳에서 추념식이 열린다

충혼탑 글씨는 우남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국내 유일)이라고 한다

 

▲ 충장군 신립장군과 팔천고혼위령탑

    이 탑은 1592년 4월 28일 도순변사 신립이 휘하 장졸 8천여 명과 함께 이곳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나라를 수호하고자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전적지임을 기리기 위한 위령탑이다.

 

 

▲ 위령탑 앞에 있는 특이하게 생긴 리기다 소나무

 

▲ 멋진 소나무 숲을 거닐면 좌우측에 많은 조각작품이 있는데 비가 오는 관계로 사진으로 남기지 않고 그냥 눈 요기만 하고 지나갔다.

 

▲ 탄금정 우측 아래로 "열두대"가 있다

 

▲ 남한강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열두대"

    바람이 얼마나 많이 불었을까, 많은 소나무가 뿌러져 있었다

 

▲ 탄금대 내에 있는 "대흥사"

    비가 와서인지 사람 한 명 만나지 못했으며, 우리도 외부만 대충 둘러보고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했다.

 

▲ 대흥사로 한바퀴 돌아 다시 주차장으로 이동 하루만에 각기 다른 지역의 명승지 3곳을 둘러보았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3곳, 아들 덕분에 하루를 알차게 보낸 것 같다.

    다음에 충주 갈 일이 있으면 이번처럼 또 구경하며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