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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5.18.재약산 본문

영 남 알프스

09.05.18.재약산

지리산 독사 2009. 5. 22. 19:20

언제 : 2009. 05. 18. 월요일(맑음)

어디 : 울산시 상북면 대리 재약산(1,108m)

누구 : 혼자서

족적 : 강촌연수원--철구소--죽전고개--고사리분교--문수봉--재약산(수미봉)--쉼터--주암계곡--주암마을--단장천--용주암--철구소--강촌연수원

시간 : 10:30 산행시작 17:00 산행종료------6시간 30분소요 (중식 및 휴식 포함)

유래재약산(載藥山)은 재암산(載岩山) 또는 재악산(載嶽山)이라고도 불렀다,  문헌상에 나타난 자료에 의하면 영정사 창건에 나타난 기록에 의한다,  즉 신라 24대 흥덕왕 셋째 아들이 불치병에 걸려 고민하던 중, 이 산의 약수를 마시고 불치병이 나은 뒤, '약수를 가지고 있는 산' 이라 하여 재약산이라 하였고, 그 샘을 "신령스런 우물"이라 하여 영정(靈井)이라 하고 현재의 표충사 자리에 영정사를 짓고 병을 낮게 해준 신령께 보은의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사자평은 재약산 동편의 해발 800m 고지에서부터 산정으로 비스듬히 이어진 억새평원이다, 120여만평의 사자평은 넓은 대지에 황색의 잎새가 무질서하게 들어서 있으나 지금은 인위적으로 조성을 하는 단계에 있다, 신라시대 화랑들의 수련장이기도 했다는 이곳은 원래 숲이 우거졌으나 일제때 일본인들이 스키장을 만든다고 벌채해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한겨울 날씨에도 다른 지방과 달리 온화한편이라 눈이 쉽게 녹아버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후 화전민들이 들어오면서 억새평원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학자는 화산 폭발 후, 분화구가 함몰되거나 매몰되어 고원형태로 되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일제말기에 우찌노(內野)라는 일본인이 목장을 경영했던 곳이며 그 당시 방목했던 한우가 2백두를 넘었다고 한다, 사자평 마을은 1960년대 정부의 정책적으로 개간하였고 해방 후에는 귀환동포가 화전을 일구어 감자와 채소를 가꾸었다고 한다,

고사리분교는 사자평마을에 있었으며, 산동국민학교 사자평분교(일명 고사리분교)로 1996년 2월 29일 1개학급 2명의 학생으로 사자평분실로 개설되어 1969년 3월 1일 사자평분교로 승격된 미니학교였다, 그동안 사자평분교 주변에 막걸리를 파는 식당들이 산재해 있었으나 "산들늪 고산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이후부터 주변 식당들이 모두 철거되었다,  

후기 : 영남알프스는 주산이라고 할수 있는 가지산을 비롯 운문산, 천황산(사자봉), 재약산, 간월산, 신불산, 영취산 등 7개의 고산대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다 고헌산과 문복산을 넣기도 한다,

일요일 당직으로 인하여 산행을 못하고 다음주는 집안행사로 인하여 산행을 할 수 없어 당직을 하고 바로 개나리봇짐을 싸서 대리마을에 있는 길천초등학교 이천분교로 향했다,  산행 지도상에는 철구소 좌측으로 직등코스가 있어 이 코스를 들머리로 하려고 찾았으나 찾을길이 없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어 옛날 약초꾼들이 다니던 길로 접어들었는데 말 그대로 혼자서 숲속을 헤메는 꼴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산 중턱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꼴이 되다보니 오기가 생겨 길도 없는 산죽 밭을 헤집고 올라 능선에 희미한 약초길을 찾을 수 있었다, 약초길을 따라 오르니 전방에 확 트인 사자평이 나타나고 고생 끝 행복시작이란 말이 떠 올라 나 혼자 피식 웃으며 사자평을 가로질러 고사리분교로 향했으나 이곳에도 상점이 다 철거되어 막걸리 한사발 구경도 못한 산행이 되었다,    

 

  강촌연수원 위쪽 다리를 들머리로 출발

 연수원을 지나면 바로 출렁다리가 나옵니다. 바로 우측이 철구소이구요?

 깊이 7m가 넘는 주암계곡 철구소이다, 철구소는 밀양 호박소, 파래소와 함께 영남알프스 3대 소(沼)이다, 철구소에 얽힌 전설은 하늘의 저주에 의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 이무기는 천년을 더 기다리면 용이 될 기회를 얻는다는 말에 소에 살고 있는 고기를 잡아먹으면서 하루 하루를 견뎌 나가고 있었다, 어느 봄 날 마을 사람들은 철구소 옆에 있는 넓은 반석위에서 화전 놀이를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술과 떡을 빚어 먹으며 즐겁게 놀다가 철구소의 물고기를 잡기로 했다, 소 안에는 미무이가 살고 있는 줄을 알턱이 없는 마을 사람들은 이 마을에서 고기를 잡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계피가루 3말을 소안에 넣기로 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고기는 한 마리도 떠오르지 않고 오히려 조용하기만 했다, 그러다 갑자기 소용돌이가 일면서 시커먼 물체가 요동을 치더니 물 위로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이무기가 죽은 것이다, 그런데 이무기가 죽자마자 마을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이 나서 마을 전체가 불에 타는 괴변이 발생했다, 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은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의 한이 이같은 재앙을 불러 일으킨 것으로 생각하고 다시는 소생하지 못하도록 이무기를 3토막 낸 뒤 주암계곡 건너편의 성지골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런 이후로 화전놀이는 물론 멱감는 일도 삼가고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며 또 철구소 맞은편에 전설의 단면을 실감나게할 만큼 용왕각이 무너질 듯 서있다-----울주군청 홈 마을소개  

 지금의 철구소로 위쪽에서 바라보았다

 용주암 전경으로 철구소에서 용주암까지 갔다가,,,,용주암 좌측 등산로를 찾지 못하여 다시 철구소로 알바

철구소에서 이천분교쪽 산길로 약 50미터가면 위와 같이 나무에 이정표가 매달려 있다,,,,옛날 사람들이 다니던 약초길인데,,,,이곳을 헤집고 들어가 길도 없어 산죽 밭에서 고생 엄청했다

 철구소 좌측 등성이를 헤집고 올라서면 사자평이 바라보이고, 이곳에서 좌측으로 약 50미터정도 가면 죽전고개가 나온다,  죽전고개에서 코끼리봉, 향로산 방향으로 약 40여미터 가면 우측으로 사자평을 가로지르는 등로가 열려 있다,

   경남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산 1번지 산들늪 고산습지보호지역은 재약산 남동쪽 사면의 720-760m 고원에 위치하고 있는 산들늪은 영남의 알프스로 불릴 정도의 절경이 뛰어난 경남 밀양의 재약산 7부 능선 자락에 형성되어 있는 고산습지로서 이탄(泥炭)층이 발달되어 있으며 삵 등 환경부 멸종위기 야생동물들과 멧새, 붉은머리오목눈이, 아무르장지뱀과 복주머니난, 큰방울새난, 천마 등 희귀 동. 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자연자산으로 환경부는 이곳을 2006년 12월 28일자로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하여 보호 관리하고 있다,  

 문수봉에서 바라 본 관음봉으로  멀리 향로산이 조망된다,

 천황산 표충사(天皇山 表忠寺)----- 밀양시에서 동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재약산 남서쪽 기슭에 1천년 역사를 가진 표충사가 있다, 원효가 창건하여 '죽림사'라 했다, 그 뒤 신라 흥덕왕 4년(829년)에 황면선사가 재건하여 영정사로 이름을 바꿨다. 그 뒤에 다시 폐사 되었는데 1839년 헌종 5년에 관자리에 사당 3칸을 신축하여 무안면 표총사에 있던 청허, 사명, 기허대사의 진영(眞影)과 위패를 옮겨와 절 이름을 <표충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 절은 1958년 9월 17일자 국가지정 국보 제75호인 표충사 청동함은향완(靑銅含銀香琓), 보물 제467호인 3층 석탑 그리고 사명대사 유물 200여점의 문화재를 보관하고 있다, 

<문화재청 기준>은 표충사는 신라 무열왕 원년(654)에 원효대사가 나라의 번영과 삼국통일을 기원하고자 명산을 찾아 다니던 중, 청황산정에 올라 남쪽계곡의 죽림(竹林)에서 오색채운(五色彩雲)이 일고 있는 것을 보고, 이곳에 터를 잡아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죽림사라 하였다. <<이후 신라 흥덕왕 4년(829)에 인도의 고승 황면선사(黃面先師)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와 이곳에 머물때 당시 흥덕왕의 셋째왕자가 지병에 걸려 전국의 명산과 명의를 찾던중, 이곳 죽림사의 약수를 마시고 병을 치유하였다 하여 이에 왕이 크게 감탄하여 탑을 세우고 가람을 크게 부흥시키며 왕자가 마셨던 약수를 영정약수, 절이름을 재약산 영정사라 하였다, 신라시대때는 보우국사(普佑國師)가 고려시대때는 해린국사(海隣國師)와 일연선사(一然先師)가 머물며 선풍을 크게 떨쳤으며 특히 일연선사는 이곳에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탈고하였다>> 조선 헌종 5년(1839)에는 임진왜란때 항마구국(降魔救國)의 위훈대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표충사당을 무안면 중산리 영축산 백하암에서 이곳 영정사로 옮기면서 절이름 또한 표충사로 개칭되어 오늘날 명실공히 사명대사의 호국성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문수봉 정상에서

 재약산 정상에서 바라 본 사자봉(천황산)...그 뒤로 운문산이 조망된다

 재약산 정상에서 멀리 가지산과 상운산이 조망되고

 재약산 정상에서 멀리 좌로부터 간월산, 신불산, 영취산이 조망되고,

 재약산 정상에서 바라 본 문수봉과 그 뒤로 관음봉  

 재약산 정상에서 사자봉 방향으로 내려서면 우측 주암계곡 갈림길이 있다, 

 주암계곡으로 하산하면 위와 같은 장수암을 만나는데 주변이 온통 금낭화 밭이다

 장수암을 지나 하산길에 우측으로 올려다 보니 심종태 바위가 웅장함을 드러내고 있다, 

 심종태 바위의 전설----주암마을에서도 보이는 암봉이 심종태바위이고, 바위 아래에는 수십명이 들어가 앉을 수 있는 석실이 있다, 옛날 효성이 지극했던 심종태라는 사람이 부모의 제사에 쓰려고 송아지 한마리를 길렀는데 하룻밤에 그만 송아지를 도적이 가지고 가버렸다. 심종태는 도적이 몰고 간 것도 모르고 송아지가 제발로 나간 줄로만 알고 이산 저산 찾아 헤멨다. 이 바위굴에서 도적이 썩 나서면서 "우리는 이 천황산을 거점으로 하여 밀양, 동래, 양산, 언양 할것 없이 주름잡고 다니는 밤 손님이야" 라고 하였다.

심종태는 "간밤에 부모님 제사에 쓰려던 송아지가 나가 버려서 찾아 헤매다 여기까지 오게된 것입니다." 라고 했다. 도둑은 효성이 지극하구나 그것도 모르고 우리가 송아지를 잡아먹었구나. 심종태는 "이제는 부모님 제사에 무엇을 놓고 지내나" 하고 한탄을 했다 도둑은 "우리가 아무리 밤 손님이지만 어찌 너 같은 효자의 송아지를 잡아먹고, 그냥 있겠나" 하며 두목은 금 삼십냥을 심종태에게 주더라는 것이다. 심종태는 송아지 두 마리를 사다가 한 마리는 잡아서 제사에 쓰고 한 마리는 길렀는데, 이 송아지를 나중에는 수십 마리로 늘어나 부자가 되었다 한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심종태바위라 부른다 

 주암계곡의 쌍폭...쉼터를 지나 100여미터 내려서면 그때부터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선행을 즐길 수 있다, 계곡 끝까지 크고 작은 소가 이어져 알탕하기는 그만이다.

 주암마을에 설치된 산행 안내도,,,,죽전마을과 철구소 사이에 예전에는 등산로가 있었는데 지금은 찾기가 힘들어 대다수 산꾼들이 죽전마을에서 죽전고개를 지나 재약산으로 향로산으로 산행을 하고 있다. 난 죽전마을과 철구소 사이 능선 약초길을 헤매는 산행을 하였다. 

  이곳은 용주암에서 단장천 방향으로 조금 가면 사자평원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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