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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무학산 "2010. 07. 10." 본문

경 상 도 산행

마산 무학산 "2010. 07. 10."

지리산 독사 2010. 7. 15. 23:24

언제 : 2010. 07. 10. 토요일

어디 : 경남 마산시 무학산(761.4m)

누구 : 초등학교 동창과

족적 : 청산아파트--봉화산(264m)--팔각정--서마지기--무학산--안개약수터--대곡산--만날고개

시간 : 12:50 산행시작 16:50 산행종료------4시간

유래마산 시가지를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무학산은 무성하게 우거진 숲과 조화를 이루며 흐르는 계곡이 있어 마산시민들의 등산과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으며, 무학산의 옛 이름은 두척산이었는데 그 유래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무학산이란 이름은 옛날 신라 말기 대학자인 고운 최치원이 멀리서 이 산을 바라보고 그 모습이 마치 학이 춤추는 것과 같다 하여 '춤출 무(舞) 학 학(鶴)'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후기 : 1년에 두 번 만나는 초등학교 동네 친구들이 토요일 저녁 창원에서 모임을 갖기로 하였다. 그러나 토요일 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기 싫어 무학산 등산을 위해 울산에서 혼자 출발했다. 마산으로 가면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친구는 부산에서 마산으로 가는 중이라며 같이 등산을 하자고 했다. 발목을 다친 친구가 등반의 동반자가 되어주고 또 주변 산에 대한 설명까정.....초딩 친구가 정말 좋은 것이여....!  

 ▲ 학이 춤추는 무학산 정상에서 친구와 한 포즈

  ▲ 봉화산 봉수대----봉수란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급보를 전하는 통신수단이다. 이 제도는 처음에는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군사적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기록상 고려 중기(12, 13세기)에 처음 이 제도가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실시된 것으로 추정된다.

봉수대는 일정한 거리를 둔 산곡대기 중에서 시야가 트인 곳에 설치하엿다. 그리하여 평시에는 불꽃이나 연기를 한 번 올리지만,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두 번, 적이 해안에 근접해 오면 세 번, 바다에서 접전이 일어나면 네 번, 육지에 상륙하면 다섯 번의 불꽃이나 연기를 피웠다,

조선시대에서도 계속 사용되었던 이 곳 봉수대는 조선시대 다섯 곳의 중심 봉수로 중에서 동래 다대포에서 시작하여,

서울에 이르는 제2봉수로에 속하는 곳이다. 이곳 봉수대 남쪽으로 진해 고산 봉수대와 연결되고, 북쪽으로 함안 칠서의 안곡산 봉수대와 연결된다

 ▲ 서마지기에서 바라 본 무학산이다,,,,, 왜 서마지기라고 했을까? 시골 농사를 지을때 "한마지기, 두마지기, 서마지기"하는

그 서마지기인지 궁금하다. 무학산 정상으로 향하는 365계단으로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계단에 표시를 해 둔 것이 특이하다

 ▲ 서마지기에 서 있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그러나 지하여장군의 머리부분을 없다,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산다는데 나무 조각은 아닌가 보다 

 ▲ 무학산 정산 전 365계단

 ▲ 무학산 정상에서 떡시루를 닮은 시루봉을 줌으로

 ▲ 무학산

 ▲ 무학산 정상에서 가운데 학봉과 안개에 갇힌 마산 시내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나 멀리 진해 장복산은 가물가물 하다

 ▲ 무학산 정상에서 가야 할 돌탑봉을 바라보며

 ▲ 돌탑봉에서 무학산 정상을 바라보며

 ▲ 산행 중 만난 털중나리

 

 ▲ 해발 621m 안개 약수터 옆에 핀 꽃창포 

 

 ▲ 물맛이 정말 시원했던 안개 약수터

 ▲ 안개 약수터에서 바라 본 학봉

 

 ▲ 대곡산 정상부에 식수를 한 "대곡청송"으로 주변 소나무와는 전혀 다르다.

 ▲ 만날고개 유래 앞에서

▲ 만날 고개 전설

마산시 월영동 산 160번지에는 애절한 전설이 전해져 온다, 고려말 마산포 어느 이씨 가문에는 편모슬하에 3남매가 있었다.

말이 양반이지 대주는 고질병으로 몸져누웠고, 큰딸이 열일곱, 둘째딸이 열여섯, 막내아들이 열살남짓하여 생활이 말이 아니였다,

그리고 이웃고을 감천골에는 돈으로 진사벼슬을 산 천석꾼 윤진사댁에 서른살 넘은 반신불구에다 벙어리인 외아들이 있어 곳곳에 혼처를 구하였으나

마땅한 자리가 없어 세월만 보냈다, 이씨댁 이웃에 행상다니는 여자가 이씨집 형편을 잘 아는터라 윤씨집으로 큰딸을 시집보내면 전답 수십두락과 돈을

얻을수 있어 병도 고칠수 있을 것이라며 혼인할 것을 권하였으나 아무리 살림이 어렵고 구차하더라도 병신에게 딸을 줄수는 없다고 거절하였다,

할수 없어 행상인은 큰딸을 직접만나 윤씨댁 외아들과 결혼하면 집안도 살리고 어머니 병도 고칠수 있다고 설득하였다,

큰딸은 굳은 결심을 하고 혼사를 허락하여 그해 봄 병석에 누운 어머니와 어린 남매를 두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만날고개를 넘어

윤진사댁으로 시집을 갔다, 남편은 반신불구에 벙어리요, 남편구실도 못하는데다 시부모의 고된 시집살이에 자식을 못낳는다고 구박을 더해갔지만,

남편과 시부모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이럭저럭 삼년이 지나 병든 친정어미니와 동생들을 보고싶어 시부모에게 근친(여자가 시집와 첫 친정나들이 가는것)을 청하였으나 호된 꾸중을 맞는 것을 본 남편이 부모몰래 아내를 만날고개까지 데리고 가서 얼른 친정에 다녀오라고 하며

고개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단걸음에 친정에 도착하였더니 어머니의 병을 완쾌되었고, 가세는 좋아져 말없이 기뻤으나 시집살이 생각에

돌아가지 않으려하자 어머니는 "여자는 출가 외인이라"며 호통을 쳐 하는수없이 눈물을 흘리며 애닮은 마음을 돌려 시가로 향했다.

    그러나 만날고개에 도착하니 기다리던 남편은 그 동안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도망쳐 나가살라"는 유언만 남기고 머리를 돌에 부딪쳐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었다, 처절한 남편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한맺힌 청상과부의 신세로 살아가기를 몇해 윤진사댁 며느리는 그리운 친정의

안부라도 전해듣고 친정집 처마라도 보고싶어 음력팔월 열이렛날 선듯 만날고개로 향했다,

그런데 때마침 친정어미니와 동생들도 시집간 딸의 안부나 들을수 있을까하여 넘나드는 행인을 만나려고 만날고개를 찾아왔다,

이심전심인지 꿈에도 보고싶은 친정식구들은 서로 얼싸안고 한없는 정담을 나누었다, 이리하여 후세 사람들이 이곳을 만날고개라 이름짓고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도 팔월 열이레가 되면 헤어져 보고싶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 수백명이 찾아와 그간의 회포를

풀어 해마다 숱한 사연들이 쌓여가는 고개가 되었다.

그리고 또하나 이 고개 근처에 살던 처녀들이 시집을 가면 여러지방으로 흩어져 처녀때의 친구들을 만나기 힘드므로 추석때 친정에 왔다가 제각기 음식을 장만하여 이 고개에 와서 만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정담을 나누었다고 하여 만날고개라 이름지었다고도 한다. 

 친구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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