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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상 도 산행

10. 06. 20. 주왕산

지리산 독사 2010. 6. 25. 22:06

언제 : 2010. 06. 06. 일요일어디 : 경북 청송군 주왕산(720.6m) 누구 : 100인 산악회 회원 10명족적 : 주왕산 주차장--장군봉--월미기--금은광이 네거리--제3폭포--주차장(원점회귀)시간 : 10:50 산행시작 16:10 산행종료------5시간 20분(중식포함)유래 : 주왕산(周王山)은 한반도 산맥의 중심 뼈대를 이루는 백두 대간의 등줄기가 국토 동남부로 뻗어나온 지맥에 위치한다. 수많은 암봉과 깊고 수려한 계곡이  빚어내는  절경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3대 암산의 하나이다. 1972. 5. 30  관광지로  지정된 후, 1976년 3월 30일 12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석병산, 대둔산, 주방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대전사 뒤 기암(奇巖)이 주왕산의 상징이다. 
공원의  총면적이 105.582 평방킬로미터로 행정구역상으로 청송군과 영덕군의  2개군 5개면에 걸쳐있고 북쪽에는 설악산과 오대산,  남쪽에는 경주, 서쪽에는 속리산과 덕유산등의 국립공원이 인접해 있으며 태행산, 두수람, 가메봉 등의 봉우리 외에도 주방계곡, 절골계곡, 월외계곡 등이 산재되어 있다.
수백미터  돌덩이가 병풍처럼 솟아있어, 신라 때는 석병산이라 부르다가 통일신라 말엽부터 주왕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산 이름의 유래는 신라 말부터는 주왕이 은거하였던 산이라 하여 주왕산 으로 불리게 되었다.
주왕은 중국 당나라 때 주도가 진의 회복을 꿈꾸며 후주천왕을 자칭하고 반역을 일으켰으나 당나라 군사에게 패하여 이곳 석병산(주왕산의 예전이름)까지 쫓기어 왔다.
이에 당나라 왕이 신라왕에게 주왕을 잡아달라 요청하여 주왕은 이곳에서 신라장군(마장군 형제들)에 의해 주왕굴에서 최후를 마쳤다고 전해온다
후기 : 약 8년전 주왕산을 갔다온 기억이 있다. 그 당시 1박 2일로 하루는 등산, 하루는 영덕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기억이 있어 더욱 추억이 있는 산이다. 출발 전 얼마나 변했을까 하는 생각에 잠겼으나 막상 산행을 시작하니 변한 것이라곤 주차장 주변 상점들 뿐 산은 옛 그대로이다. 산행 시작부터 시야에 들어오는 기암의 위용에 또 한 번 감탄을 하며, 정말 가족같은 회원들과 즐거운 산행을 하였다.   ▲ 주왕산의 상징인 대전사 뒤쪽에 위치한 기암 

 

 ▲ 우측이 기암이고 좌측이 오늘의 산행 코스인 장군봉으로 오르는 암릉이다.

 

 ▲ 대전사에서 바라 본 기암, 대전사는 신라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며, 고려때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의 이름을 땄다고 한다.

 

 ▲ 대전사 마당에 있는 단풍나무인데 다른 잎은 푸른데 오직 한쪽가지만 붉은 잎이다. 나무도 돌연변이가 있는가 보다

 

 ▲ 대전사 부도 ▲ 장군봉으로 오르는 협곡..예전에 나무 데크가 없었다면 협곡을 어떻게 올랐을까?

 

 ▲ 나무 데크를 지나 암릉 전망대에서 바라 본 기암, 어느듯 눈높이와 같다 그러나 옅은 운무로 기암의 섬세함을 볼수 없어 안따깝다

 

 ▲ 장군봉 직전 전망대에서 바라 본 거대한 바위 그 위에서 인고의 세월을 견디는 소나무가 나 보다 더 힘들어 보인다.

 

 ▲ 더디어 장군봉이다.....습한 날씨에 얼매나 더운지...!

 

 ▲ 장군봉에서 월미기 방향으로 가다보면 우측에 거대한 바위가 있다. 무슨 바위라고 이름을 지어야 할까 고민 중,

 

 ▲ 제3폭포 상단부                                                                                            ▲ 제3폭포 하단부

 

 ▲ 제3폭포는 두 줄기의 낙수현상으로 쌍폭 또는 용폭이라고 하며, 혹 선녀폭포라고도 한다, 주왕산 지역 폭포중에서 최대의 크기와 웅장미를 나다내주고 있다. 2단폭포인 제3폭포는 1단 폭포에 의한 침식혈과 폭호가 존재하고, 전체적인 낙수차는 10m 내외로 형성되어 있으며 유량에 따라 폭포의 웅장함이 다르게 나타난다.

 

 ▲ .......!

 

 ▲ 제2폭포도 2단 폭포로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수량이 적어 아쉬웠다.

 

 

 

 

 ▲ 주왕산 계곡은 위와 같이 물 흐름 하나 하나가 바위와 어우러져 세월의 흐름을 알게한다

 

 ▲ 웅장한 계곡 바위 틈의 말벌집.....사람이 접근 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줌으로

 

 ▲ 제1폭포

 

 ▲ 제1폭포를 지나면 아름드리 둥근바위가 계곡을 가로막아 동굴을 연상케한다.

 

 ▲ 학소대(鶴巢臺) : 하늘을 찌를듯이 솟은 절벽 위에는 청학과 백학 한 쌍이 둥지(巢)를 짓고 살았다하여 학소대라 불린다.어느 옛날 백학이 사냥꾼에게 잡혀 짝을 잃은 청학은 날마다 슬피 울면서 바위 주변을 배회하다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슬픈 사연이 전해오고 있다.지금은 학은 간데 없고 그들의 보금자리 터만 절벽 위에 남아 옛 주인을 그리워하고 있다. 

 

 ▲ 학소대 하단부의 말벌집

 

 ▲ 시루봉은 그 생김새가 떡을 찌는 시루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측면에서 바라보면 마치 사람의 옆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시루봉에는 옛날 어느 겨울에 한 도사가 이 바위 위에서 도를 닦고 있을 때 신선이 와서 불을 지펴 주었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으며, 바위 밑에서 불을 피우면 그 연기가 바위 전체를 감싸면서 봉우리 위로 치솟는다고 한다. ▲ 시루봉의 옆면 모습으로 정말 사람 얼굴을 닮았다

 

 ▲ 급수대(汲水臺)는 신라 37대 왕인 선덕왕이 후손이 없어 29대 무열왕의 6대 손인 김주원(金周元)을 38대 왕으로 추대하였으나 때마침 그가 왕도인 경주에서 200리나 떨어진 곳에 있었고, 홍수로 알천(閼川)이 범람하여 건너올 수 없게 되자 대신들이 이는 하늘의 뜻이라 하여 산대등 김경신(金敬信)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리하여 김주원은 왕위를 양보하고 이곳 주왕산으로 피신하여 대궐을 건립하였는데 당시 산위에는 샘이 없었으므로 계곡의 물을 퍼올려 식수로 사용하였답니다. 그 후로 이곳을 급수대라 부르게 되었다

  

 ▲ 급수대 근접 촬영....저 위에서 살수 있었을까..전설이란 참....!

 

 ▲ 하산 후 대전사에서 주왕산의 상징인 기암을 한 번 더 귀경하고

 

 ▲ 하산 후 기암을 한 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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