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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7. 16. 벽송사와 서암정사 본문

해밀 여행

2011. 7. 16. 벽송사와 서암정사

지리산 독사 2011. 7. 19. 01:46

유래 : 벽송사는 조선중종 시대인 1520년 벽송지엄선사에 의해 창건 되었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여 도를 깨달은 유서 깊은절이다. 조선시대 불교의 선맥에서 보면 벽계정심, 벽송지엄, 부용영관, 경성일선, 청허휴정(서산), 부휴선수(사명), 청매인오, 환성지안, 호암체정, 회암정혜, 경암옹윤, 서룡상민 등 가라성 같은 정토조사들이 벽송사에서 수행 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다. 아울러 선교를 겸수한 대 종장들을 108분이나 배출하여 일명 " 백팔조사 행화도량" 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벽송사는 지리산의 천봉만학을 앞뒤 동산과 정원으로 하여 부용이 활짝 핀 것과 같은 부용만개, 혹은 푸른 학이 알을 품고 있다는 뜻의 청학포란의 형국에 자리하고 있다. 고인이 "운거천상(구름 위 하늘 세계) 별유천지(인간 세상 밖에 따로 있는), 부용정토(연꽃이 활짝 핀 극락정토에), 조인만대(조사의 깨달음 만대에 이어지리)" 라는 말로 표현하였듯이 벽송사는 만고에 수려한 풍광속에 위치하고 있다.

벽송사를 창건한 벽송선사는 태고보우, 벽계정심 선사로부터 내려오는 심인을 전해 받아 조계정문의 정통조사가 되었다.

선사는 "무자화두"에 의해 무명을 타파하고 선요에 의해 지해의 병을 떨쳐버렸으니, 간화선 수행법에 의해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은 조선의 첫 번째 조사가 된다. 그래서 벽송사는 간화선의 제일 조정으로서의 역사를 간직한 한국선불교의 근본도량이 되는 것이다.

벽송대사의 뒤를 이어 벽송산문의 제 2대 조사에 오른분이 부용영관 선사이다.부용선사사는 도가 높고 학문이 깊어 배우러 오는 승속제자가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특히 영호남 일대에 부용선사의 가르침을 받은 선비가 수 없이 많아 "전단향나무를 옮겨 심으니 다른 나무들도 향기가 난다" 라고 하는 말이 널리 유행하였다.

부용영관 문하에 수많은 제자가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분이 서산대사라 불리는 청허휴정과 부휴선수이다.

서산대사는 깨달음을 얻은 뒤 벽송산문의 제 3대 조사가 되어 지리산 일대에서 행화하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도도총섭이 되어 승군을 일으켜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데 친력을 다하게 된다.

한국선문의 거장 청허휴정이 벽송조정의 제 3대 조사라는 사실은 벽송사 사적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서산대사 문하의 사명대사와 청매조사도 이곳 벽송사에서 오도하여 크게 불법을 떨치게 된다. 그리고 부용영관의 다른 한 사람의 수법제자인 부휴선수선사 또한 벽송사에서 도를 깨닫고 벽송산문의 조사가 되어 오랫동안 지리산에서 행화하였다. 오늘날 한국 불교 출가스님의 모두가 서산문파와 부휴문파에 속한다.

서산과 부휴 양대조사가 모두 벽송사 출신이라는 사실은 벽송사가 조선불교의 종가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벽송사를 가리켜서, "조계조정, 벽송총림, 선교겸수, 간화도량" 이라고 불렀다. 1704년(숙종30년)에 환성 지안대사가 벽송사에 주석하며 도량을 크게 중수하였다. 이때에 불당, 법당, 선당, 장당, 요사 등 30여동의 전각이 즐비하였으며, 상주하는 스님은 300여명에 이르렀고, 부속 암자는 10여개가 넘었다고 전한다. 이로부터 금대암에 선원이 개설되어 수선납자가 운집하고, 벽송사 본당에는 강원이 개설되어 근세 일제 강점기까지 지속되었으니, 근 300년동안 조선불교 제일의 총림이 이루어져 선교겸수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이로부터 선교를 겸한 대종장들이 벽송사에 수선안거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게 되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근대의 선지식이신 경허선사도 벽송사에 주석하며 서룡선사 행적기를 집필하였다.

특히 벽송사 강원의 마지막 강주를 역임한 초월동조대사는 일제 강점기에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옥고를 치르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일제의 조선불교 말살정책으로 인해 400여년간 지속되어 온 한국불교 최고의 조정인 벽송사의 사세도 기울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전쟁으로 시작된 지리산 빨치산들의 암약(당시 벽송사는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됨)으로 말미암아 국군에 의해 방화되어 완전 소실되는 슬픈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60년대 이후 구한원응 대사의 권력에 의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옛날 선종의 최고 조정에 벽송선원을 낙성하여 을유년(2005년)하안거에 개원하여 눈 푸른 남자들이 수선정진할 수 있는 선찰종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벽송사에는 신라 양식을 계승한 3층 석탑(보물 제 474호)과 경남 유형문화재인 벽송선사진영, 경암집 책판, 묘법연화경 책판과 경남 민속자료 제 2호인 목장승 등의 문화재가 보존되고 있다.

특히 목장승은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깃들어  찾는이는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선방 뒤 탑전 앞에 천년의세월을 묵묵히 서있는 "도인송"과 "미인송"의 전설 또한 유명하다. 예로부터 목장승에 기원하면 애정이 돈독해지고, 도인송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을 이루고 한가지 소원이 이루어지며, 미인송에 기원하면 미인이 된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벽송사 선방에서 도인이 유래없이 많이 나와서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여기서 생겨났다고 한다.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인 벽송사를 참배하여 묵은 업장을 소멸하고 정복을 닦아 성불인연을 가꾸어 보자. 아울러 벽송사 목장승과 도인송, 미인송의 기운을 받아 건강과 소원을 성취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서암정사는 석굴법당 극락전 조성내력은 이곳 지리산은 우리나라 명산으로 삼신산 중의 하나이면서 산세가 험하고 깊어 6.25를 전후해서는 전쟁의 와주에서 참혹한 비극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지난날 심산유곡(深山幽谷)의 승지(勝地)를 찾아 뜬구름을 벗삼아 정처없이 산수간(山水間)에 노닐던 수행자 원응(元應)스님이 우연히 여기를 지나다가 비극의 자취가 널려 남아있는 이곳에서 이유없이 비참하게 죽어간 원혼들의 비탄어린 울부짖음을 비몽사몽간에 듣게되어 이 모든 일이 인간의 끝없는 이기심과 탐욕의 공동 과보 임을 절감하고 스님은 이들의 원한을 달래기 위하여 끝없이 기도하면서 발원하기를 "이곳에서 희생되어 원한에 사무쳐 방황하는 무수한 고혼들이 하루 속히 증오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나아가서는 조국분단의 비극이 속히 종식이 되며 더 나아가서는 모든 인류가 부처님의 광명 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극락정토의 세계를 이루게 하리라" 그리하여 장엄하고 상서로운 이 자연석벽에 아미타불 지장보살 존상을 위시 미타회상의 무수한 불보살을 조각으로 조성하여 영원한 이상세계인 극락정토를 현출하는 가운데 우리의 정서 속에 간직되어 있는 이상향의 모습을 또 여기에 가미하고, 그리고 또 비로자나 부처님과 문수 보현 선재동자 등의 불, 보살을 모신 비로전을 조성하여 화엄회상을 나투니 극락정토와  화엄세계가 서로 조화롭게 혼융한 화엄정토의 도량을 구현하였다.

때 맞추어 원응스님이 여기 성지를 만나 성스러운 불사를 이룩함은 오늘을 기다린 불가사의한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불세계장엄으로서 이장소는 현시대의 보물이자 후대에 물려줄 문화유산 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우리 불자님들의 성보로서 많은각광을 받고 있으며

참배하는 모든 이의 끝없는 마음의 안식처가 되고 있습니다.

 

후기 : 내일 지리산 등산을 위하여 울산에서 오후에 출발했다.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 도착 시간이 남아 한국선불교 최고의 종가 벽송사와 굴법당으로 유명한 서암정사를 참배하기로 했다. 처음 가보는 곳이라 마음이 설레였으나 아니다 다를까 정말로 마음이 숙연해지고 부처님의 품안에 안기는 듯한 평온한 마음이 들었으며, 국골의 장시간 산행을 기원하였다.

 

▲ 서암정사 굴법당 좌측 기와 있는 곳이 스님이 출입하는 곳이고, 우측이 대중이 출입ㅎ라는 곳이다.

▲ 한국선불교 최고의 종가 벽송사 

▲ 원통전 뒤로 미인송과 도인송(내 생각으로는 좌측이 미인송 우측이 도인송)

 

▲ 벽송사 삼층석탑.....보물 제474호

이 탑의 위치는 원래 벽송사 대웅전 동ㅍㄴ에 세워 놓은 것인데 사찰이 아래로 옮겨져 탑만 남게됐다.

2중기단 위에 방형의 3층 탑신부를 이룬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그대로 계승한 탑이지만 사찰이 세워진 때가 조선시대(1520년)이므로

그때 탑도 세워진 것으로 판단된다. 탑의 윛가 법당 뒤편이라는 점이 특이하며, 신라시대의 삼층 석탑의 모습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예로서 주목되는 탑이다. 현대 탑의 상륜부에는 복발(覆鉢)과 노반(露盤)이 남아 있으며 탑의 높이는 3.5m이다.  

▲ 벽송사 부도 3기

▲ 벽송사(碧松寺) 목장승(木長丞) ...경남 민속자료 제2호

장승에는 돌로 만든 석장승과 나무로 만든 목장승이 있다. 장승의 기원에 대해서는 고대 성기(性器) 숭배에서 나왔다거나

사찰 토지의 표시로 이용되었다는 등 여러 설이 있다. 또 목장승은 솟대에서, 석장승은 선돌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장승이 지방에 따라 먹수, 벅시, 범수, 수살목, 당상할배 등으로도 불렸다.

장승은 소속과 위치에 따라 마을을 지키는 마을장승, 사찰의 입구나 사방경계에 세워진 사찰장승,

지역 간의 경계, 성문, 병영, 해창, 관로 등에 서 있는 공공장승 등이 있다.

벽송사 입구에 세워진 이 장승은 사찰에 들어오는 악귀의 퇴치, 사찰경내에서 행해지는 불법 어로와 사냥의 금지,

풍수지리상의 비보역할 등 다양한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다.

제작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략 일제시대 초기의 것이라 전한다. 목장승은 노천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서 있기 때문에

오래 가지 못한다 이곳의 왼쪽에 서 있는 "금호장군"은 역시 커다란 왕방울 눈 하나만을 빼고는 원래의 모습을 상당 부분 잃어 버렸다.

그러나 "호법대신"인 오른쪽 장승은 거의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서 있다.

머리와 큰 눈, 큰 코, 일자형 입과 수염 등이 매우 인상저으로 조각되어 있다.

 무서운 것 같으면서도 순박하고 위풍당당하면서도 익살스러운 모습이라서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이 두 장승은 불교와 민간신앙이 어우러져 나타난 조형물이라 할 수 있다. 

※ 비보란 풍수지리상에서 나쁜 기운이 깃든 산천 등에 탑, 장승 등을 세워 나쁜 기운을 억누르고 약한 기운을 도와 보충하는 것이다. 

 

 

 

 

 

 

 

 

 

 

▲ 지리산 서암정사 범종원문

나무 남방화주 지장보상,      나무 유명교주 지장보살,      나무 대워본존 지장보살

원컨데, 이 종소리 온 세상에 두루하여 철의 성곽 어두움 모두 밝히리

우리 조국 남북통일 속히 성취하고 세계가 평화롭고 온 인류는 즐거우며,

자비공명은 더욱 빛나 온 세상에 두루하여  법의 바퀴 항상 굴러 끝이 없어라

또한 원컨데, 6. 25전쟁으로 인하여 이 강토에 희생자 및 지리산 주변에서 희생된 원혼들과

이 도량 내외 유주무주 고혼들은 원한과 미움 모두 여의고 다함께 아미타부 큰 원의 바다에 들게 하소서,

그리고 원하오니 오늘 여기에 모인 대중은 현세에 수복이 산과 바다와 같이 크고 넓어지고

선망부모는 극락세계에서 왕생하며 세세생생에 보살도를 닦아 성불하게 하여 지이다.

불기 2552년 무자 세존응화일 

 

 

▲ 서암정사의 연못

▲ 여긴 참배객은 출입금지 구역이랍니다.

▲ 소나무 그늘에서 편하게 쉬시는 부처님

▲ 굴법당 좌측인 극락전이며, 우측이 법당 출입문

▲ 용완단에서 바라 본 범종루

▲ 용왕단

▲ 용왕단에서 바라 본 마천면 추성리

▲ 비로전 출입구

▲ 비로전 내로 부처님 전부 자연석 바위를 이용하여 부처님을 조각하였다

 

 

 

▲ 서암정사 정면으로굴법당은 보이지 않으며, 중앙 건물은 현재 공사중이다.

 ▲ 서암정사에서 노고단 방향의 석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