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욱이 사는 세상

2012. 4. 15. 마이산(광대봉-고금당-탑사) 본문

전 라 도 산행

2012. 4. 15. 마이산(광대봉-고금당-탑사)

지리산 독사 2012. 4. 21. 16:23

 마이산(馬耳山)

합미산성--광대봉--고금당--비룡대--탑사--남부주차장

11:05 ∼ 16:40분 ====== 점심포함 5시간 35분소요

모양이 말의 귀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전북 진안의 마이산은 산 전체가 거대한 암봉이다.

서봉인  암마이산은 685m이고, 동봉인 숫마이산은  678m이다.

남쪽에서는 섬진강 수계가 시작되고, 북쪽에서는 금강 수계가 발원한다.

신라때에는 서다산(西多山), 고려시대에는 용출산(龍出山)이라 불렀고, 조선시대부터 마이산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동봉과 서봉 사이에 448개의 층계가 있고 동봉 중턱의 화암굴에는 약수가 솟고 4월에는 벗꽃축제가 열린다

 봄에는 안개 속에 우뚝 솟은 두 봉우리가 쌍돛배 같다 하여 돛대봉

여름에는 수목 사이에서 드러난 봉우리가 용의 뿔처럼 보인다 하여 용각봉(湧角峰)

가을에는 단풍 든 모습이 말 귀처럼 보인다하여 마이봉

겨울에는 눈이 쌓이지 않아 먹물을 찍은 붓끝처럼 보인다 하여 문필봉(文筆峰)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이산의 유래 및 전설

이성계는 마이산을 속음산(束金山) 이라 부렀다. 산이 내려준 금척(金尺)을 묶는 모습이라서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오행설(五行說)에 따라 이성계가 이씨로 목성(木性, 오얏나무며 木이 들었다)이어서 마이산과 木과 상극인

금(金)의 산이고 金이 왕성하면 목성인 李씨가 害를 받기 때문에 金을 묶어 두려고 속금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안현 산천조에 '태종이 남행하여 산 아래에 이르러 관원을 보내 제사드리고,

그 모양이 말귀와 흡사하여 마이산이란 이름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마이산이 된 산신 부부의 전설도 전한다. 아득한 먼 옛날 큰 죄를 지어 하늘 나라에서 쫒겨난 산신 부부 내외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 세상에서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며 살면서 수 억겁 동안 속죄의 시간을 보냈다. 오랜 속죄의 날들을 보내고 드디어

하늘 천상계로 승천의 기회가 열렸다. 이때 남편 산신이 "이제 하늘 나라로 다시 올라갈 때가 되었소. 그러나 우리가 승천하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면 부정을 탈 것이니 사람들이 깊이 잠든 한밤중을 택해 승천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한밤중은 너무 무섭습니다. 게다가 밤중에 일을 치르자면 너무 피곤하니

푹자고 이른 새벽에 올라가십시다. 누가 꼭두새벽에 잠 안자고 우리들이 승천하는 것을 훔쳐보고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남편은 걱정이 되었지만 아내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오랜 속조의 날들이 무위로 돌아갈지 몰라 불안 했지만

이튿날 새벽에 승천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이튿날 새벽 산신 부부는 마침내 승천을 시도했다.

하늘을 향해 산이 솟아 오를때 아랫마을의 어느 부지런한 아낙네가 지성을 드리기 위해 정한수를 뜨려고

우물을 찾았다가 그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아낙네는 생전 처음 보는 그 광경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이 소리에 부정을 탄 산신 부부는

결국 꿈에도 그리던 승천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져 지금의 암수 마이봉이 되었다 한다.

화가 머리 끝가지 난 난편 산신은 아내 산신을 걷어 차고서 두 아이를 빼앗아 버렸다는 뒷얘기도 전한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숫마이봉은 두 아이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고 암마이봉은 숫마이봉을 등지고 앉아 한없이 고개를 떨군 채 후회하는 듯한 형상을, 숫마이봉은 부 아이를 거느리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문화재로는 마이산탑(전북기념물 35호), 마이산줄사철나무군락지(천연기념물 380호), 은수사(銀水寺), 금당사(金塘寺) 등

고찰이 있으며, 금당사에는 괘불탱(보물 1266호), 목불좌상(전북유형문화재 18호), 석탑(전북문화재자료 122호) 

등의 문화재가 있고, 1979년 10월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 들머리에서부터 꼴찌로 출발한다. 

산은 항상 그곳에 있다고 말하지 마라,    직접가서 그곳에 있는 것을 확인하라

산은 항상 같다고 하지마라,    직접가서 보면 사람에 따라 다르고 계절에 따라 다르다.

항상 같다고 하지말고,   궁금하면  떠나라 산이 있는 그곳으로........!

 ▲ 합미산성인데 딸랑 1장..근데 왜 합미라고 하였을까 무언가 뜻이 있을법도 한데....! 

 ▲ 요만 올라서면 광대봉이다...후미에 있다가 낙엽조 사진 찍기위해 낙엽조보다는 빨리 올랐다 

 ▲ 하루종일 고생한 낙엽조 님들...후미에서 챙기느라 고생한 님도 있습니다.

 ▲ 2

 ▲ 3

 ▲ 광대봉에서 바라 본 마이산을 줌으로 당겨보았는데..정말로 멋있습니다.

누가 산은 항상 그곳에 있다고 말했는가?...가보지 않고는 모르는데....!

 ▲ 2

 ▲ 광대봉 정상에서 이몸도 폼 한번 잡아씀다

 ▲ 광대봉 정상에서 지나온 합미산성 등로를 한번 바라보며 

▲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멋진 마이산

   ▲ 2

 ▲ 백산님

 ▲ 어이쿠 성님 배나왔소이

 ▲ 고금당 위쪽에 자리한 사리탑 그러나 어떤 의미인지 설명이 없어 아쉽다

 ▲ 고금당 

 ▲ 고금당 나옹암(古金塘 懶翁庵)

전북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에 있는 나옹암은 고려말의 고승 나옹선사의 수도처로 전해오는 자연암굴로 "나옹암"이라 하며

원래 금당사가 자리잡고 있었던 터라 일명 고금당이라고도 한다

나옹(1320~1376)은 법호로 법명은 혜근이며, 속성은 아씨(芽氏)다. 출가하여 양주 회암사에서 득도하였고,

그뒤 중국으로 건너가 인도승 지공화상으로부터 법을 받아 1358년 귀국하여 고려불교 중흥에 많은 공을 세웠다.

1371년에는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고, 보우, 무학 등 높은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토굴가" 등 많은 시와 가사를 남기고 여주 신록사에서 입적하였다 한다.

 ▲ 나옹암 내부

 ▲ 비룡대의 팔각정....근데 나봉암(527m)이란 정상석이 팔각정 우측에 있다

 ▲ 후미를 챙기느라 고생한 후미대장님

 ▲ 비룡대 팔각정에서 나도 한 폼 잡았다

 ▲ 이제 하산길이 가까와지는 모양임다....암마이봉 뒤로 숫마이봉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 탑사

1976년 4월 2일 전라북도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 임실에 살던 이갑용(李甲用)이라는 사람이

25세 때인 1885년(고종 25)에 입산하여 이곳 은수사에 머물면서 솔잎 등을 생식하며 수도하던 중,

꿈에서 신의 계시를 받고 돌탑을 쌓기 시작 10년 동안에 120여개에 달하는 여러 형태의 탑을 쌓았다고 한다.

크고 작은 자연석을 차곡차곡 그대로 쌓아올려 조성한 이 돌탑들은 높이 1m쯤에서 5m까지로 각양각색의 형태다.

그는 조의악식(粗衣惡食)으로 수도하며 낮에는 멀리서 돌을 날라다가 밤에 탑을 쌓았는데

천지음양(天地陰陽)의 이치와 8진도법(八陣圖法)을 적용, 돌 하나하나를 쌓아올림으로써 돌탑이 허물어지지 않게 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피라미드형 등 여러 모양의 탑 80여개가 남아 있다. 그는 98세까지 이곳에서 적공(積功) 기도로 보냈다.

금당사 극락전 수선루는 19840년 4월 1일 전북문화재자료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송씨 문중이 소유 관리한다.

자연 상태의 암굴을 적절히 이용하여 2층으로 건립하였고, 2층 중앙에 '睡仙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1686년(숙종12), 우애가 돈독하고 학문이 높은 연안송씨 형제인 진유, 명유, 철유, 서유가 조상의 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수선루라는 이름은 목사 최계옹이 지은 것으로 이들 형제가 80세가 되어서도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

마치 옛날 중국에서 전란을 피하여 상산에서 은거한 신선하황공, 동원공, 용리선생, 기리수의 기상과 같다고 하여 붙였다.

1884년(고종21) 후손 송석노가 중수하였고, 1888년(고종 25) 한말의 우국지사 송병선이 재중수하였다.

탑사를 바라보며 좌측은 월광탑, 중앙은 약사탑, 우측은 일광탑, 대웅전 뒤쪽이 천지탑

 ▲ 이갑룡 처사의 생애

이처사는 1860년 3월 25일 전북 임실군 둔덕면에서 효령대군 15대 손 이성우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상을 치룬후에도 묘 옆에 움막을 치고 3년간의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그후 나라의 어지러움과 인생의 괴로움에 회의를 느끼고 명산을 찾아 수도하던 중, 25세때 마이산에 들어와 솔잎으로

생식을 하며 신의 계시를 받아 만불탑을 축석했다

이 탑은 천지음양이치와 팔진도법을 적용하여 30여년에 걸쳐 탑을 완성시킨 뒤 용화세계 억조창생의 구제와 만인이 짓는 죄를 대신해 비는 기도로서 일생을 보내시다 1957년 98세로 타계하였다.

남긴 유물로는 탑 외에도 신의 계시를 받아 쓰신 30여권의 신서와 모든 재난과 재앙을 막아주는 부적 등이 있다.

특히 흔들리면서도 넘어지지 않는 만불탑의 신비로움은 중생구제의 상징으로 빛날 것이라고 한다

 ▲ 월광탑(月光塔)

이 탑은 탑사를 바라보며 좌측에 위치하고, 암마이산의 정기를 받아 쌓아올린 탑으로서 끝남을 나타낸다.

암 마이봉 옆구리쪽에서 기를 충만하는 것과 이 형상은 풍채가 웅장하며

일반 대중과 가까이 하고자하는 이갑룡처사의 초기 작품으로 보인다고 전한다

 ▲ 약사탑(藥師塔)

이 탑은 탑사를 바라보며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모든 중생들의 마음에 병, 육체의 병을 치유하는 약사탑은

보이는 쪽에서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는데 왼쪽 암벽에서 나오는 음기운이 강하여 옆으로 기울려서 쌓은 탑이라 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러나 전설은 믿어라

 ▲ 일광탑(日光塔)

이 탑은 탑사를 바라보며 우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나도산의 정기를 받아 쌓아올린 일광탑으로서 만물의 이치가 시작함을 나타낸다

생물의 탄생의 존귀함을 나타내고 자연의 기본 섬리를 말한다, 나도산 옆에서 이른 아침부터 태양은 떠 오르기 시작한다

 ▲ 삼불미륵단

삼불미륵 부처님은 1900년초에 이갑룡 처사님께서 직접 조각하여 법당에 모시고 기도를 하시던 미륵부처님이라 한다.

탑을 축조 하시는데 유교와 도교, 불교를 삼합하시고 중생제도를 위해 일념으로 기도를 하였으며,

탑은 이갑룡 처사의 공덕을 중생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30여년의 세월을 정성으로 올리신 것이라 한다.

 ▲ 2

 ▲ 줄 사철나무와 섬진강 발원지 용궁

줄 사철나무는 1910년경 탑 축조자 이갑룡처사가 식수한 것으로 천연기념물 제380호 이다

이곳 우물은 1900년초 이갑룡 처사께서 직접 만들어 지금까지 사용하는 식수이다

섬진강의 발원지이며, 반대편 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금강의 발원지가 되는 곳이 바로 용담댐이 위치한 곳이라 한다

 ▲ 천지탑(天地塔)

이 탑은 이갑룡처사님께서 만3년의 고행 끝에 1930년경에 완성된 탑으로서 축지법이 가장 많이 들었다 한다.

보는 쪽에서 왼쪽에 있는 탑이 음탑(陰塔)이고 오른쪽에 있는 탑이 양탑(陽塔)이다.

이 탑은 타원형으로 돌아올라가면서 쌓았다

상단부 삼각형 부근에 있는 조그만한 돌들은 쿳션역활을 하는 부분으로서 작은 돌들이 서로 뭉치면서 탑신을 지켜준다.

넓은 판석 자연석은 하루에 한 덜어리씩 올렸고, 맨 꼭대기 돌은 백일기도(百日祈禱)를 올린 후, 올렸다 한다.

탑 주변의 일자 신장탑(神將塔)은 33신장군으로서 천지탑을 보호하는 신장군탑들이다.

천지탑 앞에 있는 다섯개의 일자형 탑은 오방탑(五方塔)이다.

오행(五行)을 상징하고 인간은 하늘아래로 내려오고 땅에 서고 四大(地, 水, 火, 風)에서 태어나고

다시 四大로 돌아간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 천지탑 음탑이다. 양탑은 반대편에 있다

 ▲ 숫마이산 아래에 위치한 은수사

 ▲ 은수사

미륵의 모습을 한 숫마이산의 턱밑에 자리잡은 은수사는 초선초기에는 상원사라 했다가 한동안 빈터로 남아 있다가

1920년 "이주부"라는 사람에 의해 재건되면서 은수사로 개칭되었다

은수사란 이름도 태조 이성계가 이 곳의 물을 마시고선, 그 물이 은같이 맑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은수사에도 두개의 샘이 있는데 하나는 금강, 또 하나는 섬진강의 발원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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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수사(銀水寺)의 청실배나무

천연기념물 제386호인 청실배나무는 높이 18m, 가슴둘레 높이 3m이며, 가지는 동서남북으로 각기 7~9m 가량 뻗어 있다

일반배와는 다르게 푸른색의 작은 배가 열리는 청실배나무는 일명 아그배 또는 독배라고도 한다  

청실배는 산돌배나무의 변종으로 장미과에 속하며 잎은 타원형으로 그 가장자리는 톱니처럼 거칠다.

이곳 청실배나무는 몸통줄기가 도중에 네 갈래로 갈라졌다가 ,

이 가운데 두 갈래가 다시 합쳐지는 등 매우 진귀한 모양을 하고 있다.

겨울철 나무 밑에 물을 담아두면 고드름이 거꾸로 솟아 오르는데 이 역시 보기드문 현상이다.

전설에 따르면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곳을 찾아 기도하면서 그 증표로서 씨앗을 심은 것이 오늘의 나무에 이르렀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산과 사람들과 함께한 이번 산행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무릎도 다치고 카메라도 정비공장 같지만 .....!

15년전에 가보고 다시 찾은 감회 정말 좋았다

자연이 만든 최고의 걸작인 마이산, 사람이 만든 최고의 걸작인 탑사의 탑이 어우러진 자연미는 

아름다움의 극치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