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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금오봉, 고위봉 "2024. 10. 1." 본문

경 상 도 산행

경주 남산 금오봉, 고위봉 "2024. 10. 1."

지리산 독사 2024. 10. 5. 18:27

▲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慶州 南山 茸長寺谷 三層石塔) 보물 제186호다.

    용장사는 매월당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쓰며 머물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현재 몇 군데의 석축이 남아있어 절터였음을 짐작하게 해줄 뿐이다. 용장사보다 높은 곳에 세워진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자연 암반을 다듬어 아랫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면마다 기둥새김 셋이 있는 윗기단을 설치하여 산 전체를 기단으로 여기도록 고안되었다.

층마다 몸체돌 하나에 지붕돌 하나식 3층으로 쌓았는데 지붕돌과 몸돌을 별도의 석재로 조성하였고, 1층 몸돌은 상당히 높은 편이고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층급받침이 4단이고 처마는 직선을 이루다가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윗부분이 없어진 탑의 높이는 4.5m 밖에 되지 않지만 하늘에 맞닿은 듯이 높게 보여 자연과의 조화미가 돋보인다 바위 위에 세운 석탑으로서 통일신라 하대의 대표적인 우수작으로 꼽힌다

 

▲ 금오산

    경주 남산은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의 남쪽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의 두 봉우리와 60여개의 골짜기에 180여 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골짜기마다 많은 불교 유적이 남아있으니, 절터가 147개소, 탑이 96기, 불상이 119구가 된다. 또 성곽이 4곳, 왕릉이 13기 등 수많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어 노천박물관으로 불리며 2000년에는 산 전체가 세계문화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의 하나로 등재되었다. 남산은 우리계례의 숨결이 살아있는 소중한 산으로, 계례의 꿈이 서린 신화가 전해져올 뿐만 아니라 그안에 우리 조상의 예술과 문화가 깃들여 있는 역사의 산이다.

 

▲ 칠불암 마애불상군은 경주 남산 봉화골 마애삼존불과 사방불(四方佛)로서 7구의 불상을 말한다.

 

▲ 고위봉

 

▲ 경주 남산 발자취

▶ 언    제: 2024. 10. 1.(화) 08:53 산행시작 ------ 8시간 소요

▶ 발자취: 용장골 주차장 - 용장골 - 설잠교 - 용장사지 삼층석탑 - 삼화령 - 남산순환로 - 금오산 - 사자봉(팔각정터) - 상사바위 - 일천마위, 마왕바위 - 금오정 - 고깔바위 - 국사골 - 뒷골 - 칠형제바위 - 봉화대능선 - 신선대 - 칠불암(왕복) - 백운재 - 고위봉 - 열반재 - 관음사 - 용장골 주차장 ... 약 17.67km

▶10월 1일 국군의 날이 공휴일로 지정되어 막싸도라팀 9명이 가까운 경주 남산을 찾았다. 용장골에서 금오산을 올랐다가 일천바위 왕복, 다시 고깔바위능선으로 따라 통일전 입구까지 갔다가 다시 칠형제바위를 오르는 등 하루종일 남산 구석구석 돌아본 하루였다

 

경주 남산은 경북 경주시에 위치한 사적 제311호인 남산은 신라의 왕도였던 경주의 남쪽에 솟아 있는 금오산과 고위산 두 봉우리를 비롯하여 도당산, 양산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통틀어 남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산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지만, 동서로 가로지른 길이가 약 4Km, 남북의 길이가 8Km에 40여 계곡이 있고, 이 곳에는 수많은 불적이 산재되어 있으며, 여러전설과 설화들이 깃들어 있다.

신라건국 전설이 깃든 나정, 신라왕실의 애환이 서린 포석정터, 김시습이 거쳐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었다고 하는 용장사터 등 많은 신라시대 유적을 간직하고 있다. 그뿐아니라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한 이후 남산은 부처가 머무는 영산으로 신성시되어 많은 사찰과 탑이 건립되고 불상이 조성되었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이 곳은 147여 개소의 절터, 96여 개소의 석탑, 119구의 불상이 산재하고 있는 야외 박물관으로 불려지고 있다.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일천바위 갔다가 금오정까지 올라와 다시 고깔바위 능선으로 내려가 칠형제바위 능선으로 올라왔다

 

 

▲ 김시습의 금오신화 관련 시설이 있는 용장골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 용장골 공원지킴터 콘크리트 도로를 따르면 고위봉으로 바로 오를 수 있다

    용장골은 금오봉과 고위봉 사이 골짜기로 남산에서 가장 큰 계곡이며, 용장사터 등 22곳의 절터와 11기의 석탑, 그리고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등 6구의 불상이 남아 있다. 이 계곡에서 가장 큰 절터는 용장사터이다. 동쪽 능선 높은 바위 위에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용장사지 삼층석탑이 우뚝 솟아 있고 그 탑 아래에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과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 설잠교(雪岑橋)
    설잠교는 용장골에 다리를 놓으면서 김시습(1435~1493)의 정신을 기려 지은 이름이다. 설잠은 김시습의 법호인데, 이 골짜기는 조선초(1465~1471) 김시습이 속세를 떠나 산승(山僧)으로 있으면서, 단종에 대한 충절로 북향화(北向花)를 심어?ㅆ던 곳이기 때문에 그의 정신을 계승할 만한 곳이다.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또는 동봉(東峯), 법호는 설잠(雪岑), 관향은 강릉이다.

 

▲ 경주 남산 용장계 탑상곡 제1사지(용장사지)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 운영되었으며 남산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사찰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신라의 고승 대현이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보물)을 돌며 염불할 때 불상도 같이 머리를 돌렸다는 설화가 전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서 금오신화를 집필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용장사(茸長寺)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이곳이 용장사지임이 확인되었다 총 9개의 축대가 있으며, 현위치는 용장사지에서 가장 큰 건물지이다

 

▲ 용장사지에서 조금 올라가면 탑부재가 있는 전망대를 만난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고위봉과 이무기능선

 

▲ 전망대에서 용장사곡 삼층석탑을 올려다보니 탑 기단에 사람이 올라가 있다.

    보물인데 왜 올라가는지 ~~~ 에휴

 

▲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茸長寺谷 石造如來座像), 보물 제187호다.

    경주 남산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은 조각도 우수하지만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가 독특하다. 이 대좌는 자연 암반 위에 원반 모양의 돌을 층층이 쌓아올린 형태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드문 예이다. 그 위에 앉은 불상은 머리를 잃었지만, 왼쪽 어깨 위에 부처의 옷인 가사와 옷을 고정하는 끈과 매듭이 새겨져 있다. 옷자락이 무릎 아래로 흘러 대좌를 덮고 있다. 손 모양은 일반적인 손 위치와는 반대로 왼손은 손바닥을 아래로 하여 왼 무릎 위에, 오른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향하게 하여 다리 위에 두었다. 

1920년 용장사라 새긴 기와가 발견되었다. 삼국유사에 "경덕왕(742~765재위) 시기의 승려 대현이 용장사에 살았다. 절에는 돌로 만든 미륵 장육상이 있었다 대현이 이 장육상(丈六像 : 1장(丈) 6척(尺) 크기의 불상, 사람의 키를 8척이라 하므로 두 배가 되는 크기의 불상)을 돌면 장육상도 역시 대현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는 기록이 있다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茸長寺址 磨崖如來座像) 보물 제913호다.

  용장사곡 삼층석탑 아래에 위치하고 있고, 마애불 바로 앞에는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인 삼륜대좌불(삼륜대좌불)이 있다. 

이 마애여래좌상은 경주 남산의 용장사 터에 있는 바위 면에 새겨진 불상이다. 용장사 터에는 이 불상과 함께 삼층석탑(보물 제186호)과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87호)이 남아 있다. 불상의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카락을 겹겹이 새겼고, 정수리에 뼈가 머리 위로 솟아 상투처럼 보이는 육계는 크고 펑퍼짐하게 표현하였다. 눈, 코, 입이 뚜렷하게 새겨진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보인다. 옷 주름은 평행선을 빼곡하게 그려 넣어 표현하였다. 무릎 위에 놓인 오른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배 쪽ㅇ데 놓여 있다. 머리 광배와 몸 광배는 2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왼쪽 어깨 바같부분에 10자 정도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앞부분을 "태평 2년 8월(태평이년팔월)"로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이 마애여래좌상은 977년 또는 1022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용장사는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머물면서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를 썼던 곳이다. 이 석탑은 자연 암반을 깎아 세울 자리를 마련하고 1층으로 된 바닥돌 위에 3층의 몸돌을 올렸다. 무너져 절터 아래쪽 계곡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22년에 복원하였다. 이때 2층 지붕돌에 사리를 넣었던 구멍만 있고 사리는 없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바닥돌은 모서리와 내부에 1개의 기둥만 새겼다. 몸돌은 2층부터 급격하게 작아진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계단식 받침을 두고, 처마는 모서리에서 치켜올렸다. 탑의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고, 장식의 중심을 뚫어 세운 쇠기둥인 찰주를 끼웠던 구멍이 남아 있다.

용장계곡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하늘 끝에 닿아 있는 것처럼 보여 신비롭다. 주변의 넓게 트인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어 경주 남산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탑이다.

 

    이곳에서 삼화령과 남산순환로를 지나 금오산에 도착했다

 

▲ 금오산 자화상

 

▲ 금오산에서 금오정 방향으로 내려가는데 헬리곱터가 요란하였다

    소방대원들에게 확인하니 심정지 환자가 발생하여 헬기로 긴급후송 중이라고 하였다. 환자분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 환자를 헬기에 탑승시켜 후송하는 영상

 

▲ 사장봉(팔각정터)에 올라 주변 경관을 구경하고 금오정 방향으로 내려갔다

 

▲ 금오정 전 할아버지와 아이의 전설이 있는 상사바위

▼ 상사바위 전설

 

▲ 상사바위 건너편 바위 위에서 자라는 명품솔

 

▲ 상사바위 자화상 남기고 ~~~

 

▲ 일천바위와 마왕바위를 보기 위하여 옥룡암 방향으로 내려간다

 

▲ 일천바위

    경주 남산 천암곡 제1사지 :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남쪽 평탄지 끝에 건물 기단부로 보이는 장대석 2매가 남아있다. 우측에 방향 석재와 좌측에 타원형 석재는 건물의 초석으로 추정된다. 뒤쪽에는 큰 홍수가 왔을 때 이 바위만 잠기지 않아 천 명의 사람이 올라와 살아 남았다는 전설이 있는 일천바위와 물에 떠내려가던 마왕의 머리라고 전해지는 마왕바위가 있다.

 

▼ 마왕바위

▲ 일천바위 위에서

     이곳에서 경주 토함산을 구경하고 다시 금오정으로 올라갔다

 

▲ 금오정,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고깔바위 능선으로 내려갔다

 

▲ 금오정에서 바라본 토함산 전경,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들녁이 참으로 아름답다 

 

▲ 고깔바위능선으로 내려가는데 고깔바위를 지나쳤다. ㅎㅎㅎ 대신 이거라도 ~~~~~

 

▲ 국사곡 제4사지 삼층석탑과 주변 석조유물

    이 곳 국사곡 제4사지에 무너져 있던 삼층석탑은 2002년 2월에 복원하였고, 삼층석탑 주변 절터에 흩어져 있던 5점의 석조 유물들은 통일신라시대에 각각 다른 양식으로 조성된 2기의 불상대좌와 건물 초석으로 추정된다. 유물의 망실과 훼손을 방지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2013년 4월 현 위치에 받침대를 설치하고 정리하여 놓았다.

 

▲ 삼층석탑에서 국사골로 내려와 이곳에서 우측 금오봉 방향인 뒷골로 올라간다

    좋은 길을 따르다 좌측 계곡을 건너 칠형제바위 능선으로 올라간다 

 

▲ 이곳 뒷골 맑은 계곡을 건너 칠형제바위 능선으로 ~~~

 

▲ 칠형제바위에서 한 참을 즐기며 놀았다

 

▲ 칠형제바위에서 약 30여분 오르면 만나는 전망대

    전망대에서 쉬었다가 봉화대능선으로 올라가 신선대로 ~~~

 

▲ 신선대에서 0.35km거리에 있는 칠불암으로 내려갔다

 

▲ 칠불암으로 내려가면서 전망대에서 한 컷하고 ~~~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慶州 南山 神仙庵 磨崖菩薩半跏像)은 보물 제199호이다.

이 불상은 칠불암(七佛庵) 위에 곧바로 선 절벽 면에 새겨져 있어 마치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듯이 보이는데, 머리에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어 보살상(菩薩像)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풍만하고 오른손에는 꽃가지를 들고 왼손은 가슴까지 들어 올려서 설법하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팔각형으로 보이는 대좌(臺座) 아래로 옷이 흘러내리고 오른쪽 다리는 아래로 내려놓은 자세이다. 발은 연꽃 위에 있으며 이처럼 유희좌(遊戱坐 : 결가부좌의 자세에서 한쪽다리를 풀어 대좌 밑으로 내린 자세 )를 표현하였음은 드문 예이다 그 아래에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이 조각되어 있으며, 불상 높이는 1.4m이며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보인다.

 

▲ 칠불암

 

▲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慶州 南山 七佛庵 磨崖佛像群)은 국보 제312호이다

    경주 남산 봉화골 바위 면에 새겨진 마애삼존불과 사방불(四方佛)로서 7구의 불상을 '칠불암 마애불상군'이라 지칭한다.

동쪽을 향한 넓은 바위 면에 삼종상이 있고, 삼존상 바로 앞의 네모난 돌기둥에는 면마다 불좌상이 새겨져 있다. 본존과 두 보살로 된 삼존상, 돌기둥의 네 면에 새겨진 사방불을 합쳐 모두 7구의 불상들이 새겨져 있으므로 암자의 이름을 칠불암이라 부른다. 이곳에 있던 원래의 사찰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 불상군의 핵심 불상은 삼존불 중앙의 불좌상이다 이 불상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가사를 걸치고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사방불은 방향에 따라 각기 다른 손 모양을 취하고 있는데, 정면에 해당하는 동쪽면의 불상은 약그릇을 지니고 있어 약사불임을 알 수 있다.

삼존상의 뒤쪽에는 여러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또 돌기둥 위에 홈이 파여 있고, 주변에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이곳이 원래 지붕을 덮은 석굴 사원으로 추 정된다. 이 주변에서 「약사경」과 「금강경」을 새긴 석경의 파편들이 발견되어 복과 장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하는 민간의 약사 신앙과 관련된 사찰로 보인다. 석불의 제작 시기는 석굴암 본존불보다 앞서는 것으로 보고 있다.

※ 항마촉지인 : 좌선할 때의 손 모양, 오른손을 펴서 오른쪽 무릎에 얹고 손가락은 땅을 가리키는 모양이다. 석가모니가 수행을 방해하는 모든 악마르 ㄹ 항복시키고 성취한 정각(正覺)을 지신(地神)을 증명하였음을 상징함.

 

▲ 칠불암에서 신선대로 올라와 백운재를 지나 고위봉에 도착했다

    대다수 산꾼들은 용장골에서 이무기능선으로 해서 고위봉에 오른다

    우리는 이무기능선이 아닌 열반재를 지난 관음사로 하산하는 길을 택했다

 

▲ 하산길 전망대에서 바라본 이무기능선과 뒤로 금오산

 

▲ 관음사

     우리는 관음사를 지나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 용장골 주차장으로 내려가 긴 하루 산행을 마무리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