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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리 산 산행

지리산 지명 풀이

지리산 독사 2009. 6. 1. 22:21

지리산의 유래

지이산(智異山)이라 쓰고 있는 '지리산'으로 부르는 이산은 예로부터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신선이 내려와 살았다는 전설속의 삼신산 중의 하나였으며, 일명 방장산(方丈山)이라 일컬어 왔다.
방장이란 중국에서 먼 옛날부터 동해 가운데 신선이 살고 불로초가 많다고 전해지는 미지의 신비경인 봉래, 방장, 영주 삼신산의 이름 하나를 따온 것이다.
고대 중국의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려 삼천 동자를 동해 건너 삼신산인 지리산으로 보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또한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렸다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는데 간혹 남해바다에 이르기 전 잠시 멈추었다해서 두류산(頭留山)으로 적기도한다(동국여지승람)
옛문헌에는 지리산을 '地理山'으로 표기한 것도 있는데 이것은 불교에서 유래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고대 불교에서는 지리산을 문수도장으로 불렀다, 지혜의 보살 문수대성이 이산에 머물면서 불법을 지키고 중생을 깨우치는 도량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산을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의 지(智)자와 리(利)자를 따와 지리산이었다고 한다. 지리산이라 함은 신의 땅에 오묘한 이치를 간직하고 있다는 뜻 즉 "특이한 지혜를 간직한 산"이라는 뜻이다.
지리산은 색다른 일화도 지니고 있다.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큰 뜻을 품고 우리나라의 명산을 순례하며 기도를 드릴때 지리산에서만 유독히 소지(燒紙)가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성계가 등극한 뒤 지리산을 불복산(不伏山) 또는 반역산(反逆山)이라 부르고 역적을 귀양보내는 율을 세울만큼 원한을 품기도 했다는 것이다.
지리산은 또 하나의 불명예스런 이름인 적구산(赤狗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여순사건에서 6.25전쟁을 거치는 동안 빨치산의 활동 근거지가 됨으로써 얻은 이름이다.
천왕봉(天王峰), 천황봉(天皇峰)은 일제가 멋대로 산 이름을 바뀌 놓은 사례다. 큰 산이나 봉우리 이름에 들어가는 '왕(王)'자를 '황(皇)'이나 왕(旺)으로 바꾼 경우이다. 황(皇)은 일본 천황을 의미하는 것이고, 왕(旺)은 '日+王'으로 일본의 왕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천황봉(天皇峰)은 고지도인 '팔도군현지도'와 1911년에 제작된 한국지형도까지는 천왕봉(天王峰)으로 적혀 있으나 1918년 일본 총독부에서 만든 지도부터는 천황봉으로 표기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마찬가지로 강원도 정선의 가리왕산(加里王山)은 가리왕산(加里旺山)으로, 설악산 토왕성(土王城)폭포는 토왕성(土旺城)으로 왜곡된 채 사용되고 있었다. 인왕산(仁王山)은 일제 이후 '仁旺山'으로 쓰였지만 1995년 광복 50주년 때 제 이름을 되찾았다.
그동안 1915m로 알고 사용중인 천왕봉의 높이가 얼마전 경남 함양군은 대한지작공사 관계자들과 GPS이용해 측정한 결과 천왕봉의 높이가 1916.77m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서북능선 이야기)

[인월]

고려 우왕 6년(1380년) 왜구가 무려 500여척의 대병선을이끌고 들어와 각지역을 노략질하다 이곳에 이르렀다.  이성계(李成桂)는 이곳 황산에서 적을 대파했다. 이때 죽은 적의 시체가 골짜기에 쌓이고, 냇물은 피로 물들어 며칠 동안이나 피빛이었다고 한다.황산대첩에서 이성계가 얼마나 무섭게 임전의결의를 다졌는지는 황산에서 대첩을 거둔 이성계는 도주하는 패잔병을 뒤쫓아가며 계속 적을 섬멸했다. 그러다 날이 저물어 더 이상 싸우는 것이 어렵게 되자 이성계는서산으로 넘어가는 달(月)을 당겨놓고 밤 늦게까지 한 명의 왜군이라도 더 사살했다고 한다. 이곳의 마을 이름을 지금도 인월(引月)이라고 부르는 연유가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성계는 또 바람을 끌고 다니며 싸웠다고 하여 인풍리란 지명도 남겼다.

[바래봉]

흥부가 살았다는 전북 남원 운봉마을 뒤로 산 하나가 웅장하게 서 있다. 바래봉이란 본래 발산(鉢山)이라 하였으며, 바래란 나무로 만든 승려들의 밥 그릇인 바리란 뜻으로 봉우리 모양이 비슷하게 생긴데서 유래(속칭 삿갓봉. 삿갓봉은 승려들이 쓰고 다니던 삿갓 모양과 같은데서 유래) 한때는 운봉면에서 양을 방목했으나 철쭉잎을 먹은 양들이 설사를 하는 탓에 양방목을그만 두었다고 합니다(철쭉에는 소량의 독성이 있다고 하고 우리가 흔히먹는 진달래는 독성이 없습니다)


[팔랑치]

마한의 한부족이 달궁에 궁전을 짓고 살았는데 팔랑치에 병사 여덟이 지키던 수비성터 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정령치]

진한과 변한의 짐략을 막기위해서 鄭장군을 지키게 했다고 해서 붙여진이름


[만복대]

“만萬”이란 현대사회처럼 수의 개념이 아니라 모두, 전부, 무한의 개념이다. 따라서 만복이란 이 세상의 모든 복, 즉 복의 근원을 의미하고 그러한 장소라 하면 누구라도 복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성삼재]

마한의 한부족국가의 성밭이 세명이 지키던 수비 성터 라고 하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삼한시대에 마한군에 밀리던 진한왕이 전란을 피하여 지리산 심산유곡으로 찾아들어 달궁계곡에 왕궁을 세우고 피난할때 북쪽능선에 8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으므로 팔랑재(八郞재),서쪽 능선은 정 장군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으므로 정령재, 동쪽은 황장군으로 맡아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영재, 그리고 남쪽은 가장 중요한 요지이므로 성(性)이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방어하게 하여 성삼재라 부르게 되었답니다.

 

(주능선 이야기)

[노고단(老姑檀)]

신라시대 때의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 가을 제사를 올렸던 곳으로 선도성모의 높임말인 노고와 제사를 올렸던 상단의 의미로 노고단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돼지평전]

색다른 이름은 마늘 모양의 원추리 뿌리를 멧돼지들이 종종 파먹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임걸령(林傑嶺)]

고령인데도 불구하고 우뚝솟은 반야봉이 북풍을 막아주고 노고단능선이 동남풍을 막아주니 녹림속에서 천혜의 요지이며 샘터에서는 언제가 차가운 물이 솟고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고 ...조선 명종 때의 초적두목 임걸년의 이름에서 유래되어 임걸령이 되었고 이곳에 진을 치고 말을 길렀다고 하고 실제로 마구와 철촉이 발견 되었다고 하네요. 임걸령(林傑嶺)이란 이름은 조선 명종때의 초적 두목 임걸년(林傑年)의 이름에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다. 그는 화살보다 더 빨리 다녔다고 하는 다소 과장된 듯한 전설이 있다


[반야봉(般若峰)]

지리산 3대 주봉의 하나로 반야(般若)란 불교의 반야심경에 나오는 지혜를 뜻하는 말이니 지리와 이언동의로 상통하는 말이다. 정상에서 600미터 거리에 있는 북봉은 아름드리 구상나무 거목의 상록원시림 지대를 이루고 있어 창연한 경관속에 태고의 정적이 깃들어 있고 반야봉 정상에서 동쪽으로 가면 절벽아래 묘향대가 있다...


[삼도봉]

전남,전북,경남의 3도가 경계를 이루는 데서 유래가 된 암봉 으로 날라리봉 이라고도 하는데 삼도봉의 바위모양이 낫날같다고 하여 낫낱봉이라 하였던 것이 와전되어 날라리봉이 되었다네요. 화개재~화개재에서 남쪽의 연동골로 희미한 길이 이어져 있다. 처음에는 배수로처럼 좁다란 길이 내려갈수록 뚜렷하게 넓혀진다. 이 연동골~목통마을의 산길은 지난날 화개장터의 짐을 나르던 옛길이다


[토끼봉(兎峰)]

정상이 밋밋한 초원지대와 구상나무,상록수림 지대로 정연하게 구분되어 있어 마치 인공적으로 조성한 훌륭한 정원처럼 그 경관이 우아할 뿐 아니라 반야봉의 웅장한 모습이 서쪽에 솟아있고 북쪽은 뱀사골 동남쪽은 화개골의 광활한 지역을 덮고 있는 울창한 수해의 전망이 누구나 잠시 쉬어가기 알맞은 고봉이고 정상에 지보초가 군생하고 있어 지보등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총각샘]

총각샘은 옛날 심마니 노총각이 처음 알고 이용했던 샘이라고 하는데, 지난 1920년 7월에 지리산 산악회의 노총각 2명이 수소문 끝에 발견했다고 한다. '총각샘'이란 이름도 그런 연유로 불려지고 있는데, 장터목의 '산희샘'이란 여성적인 명칭과 대비시킨 뜻도 있다.


[연하천(烟霞泉)]

명선봉의 북쪽 가슴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은 고산지대임에도 숲속을 누비며 흐르는 개울의 물줄기가 구름속에서 흐르고 있다고 하여 연하천(烟霞泉) 이라 부르게 되었다


[형제봉]

높이 10m가 넘는 두개의 바위가 등을 맞대고 서있는 듯한 모습이다. '형제바위'라고 불리는 이 입석바위도 전설이 있다. 옛날에 성불 수도하던 두 형제가 산의 요정 지리산녀의 유혹을 경계하여 도신(道身)을 지키려고 서로 등을 맞대고 오랫동안 부동자세로 서있었기 때문에 그만 몸이 굳어져 지금과 같은 바위가 됐다는 것이다. 이 바위 옆으로 조금 내려가면 자그마한 동굴이 자리잡고 있는데, '연하굴'로 불린다.


[벽소령(碧宵嶺)]

벽소령은 지리산 8경 가운데 하나인 '벽소명월(碧宵明月)'로 유명하다. '지리산 등뼈의 한가운데라고 할 벽소령을 덮고 있는 밀림과 고사목 위로 떠오르는 달은 천추의 한을 머금은 듯이 차갑도록 푸른 유기(幽氣)마저 감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벽소한월(碧宵寒月)이라고도 부르며, 여기서 맞는 달밤의 고요는 현묘한 유수로 몰고가는 태고의 정적 그것이라고나 할까. 광대한 지리산 중심부의 허리처럼 잘룩한 고개로서 그 주위가 높고 푸른 산릉이 겹겹이 쌓여 유적한 산령을 이루고 있다.달밤이면 푸른숲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너무나 맑아서 오히려 푸르게 보인다 하여 옛부터 이곳을 벽소령이라 부르게 되었다..

[칠선봉]

칠선봉은 둘레에 7개의 암봉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일곱 선녀가 노니는 모습과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세석평전(細石平田)]

잔돌평전이라고도 부른다. 잔돌이 많이 평야와 같다하여 옛부터 세석평전이라 불렀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고 넓은 고원으로 그 주위가 12킬로나 된다고 하며 상중하로 식물분포가 구분된다 상층은 초생종류인 지보초,좁쌀풀,산새풀등이 군락을 이루고 중층은 철쭉이 군락을 이루는 관목지대 하층은 구상나무를 비롯한 상록수와 활엽수가 혼유림을 이룬다..


[제석봉]

원래 제석봉 일대는 아름드리 전나무와 잣나무, 구상나무 등이 하늘을 가릴 만큼 울창하게 뒤덮고 있었다. 6,25 이후 까지만 하더라고 전나무 구상나무 들이 울창하였으나 자유당 말기 농림부장관의 삼촌 되는 자가 권력을 등에 업고 제석단에 재제소를 차려놓고 거목들을 베어내면서 말썽이 생기자 증거를 인멸한 양으로 제석봉에 불을 질러 나머지 나무마져 지금과 같이 횡사 시켜 버렸답니다.


[장터목(場基項)]

장터목은 그 옛날 지리산을 사이에 두고 남쪽지방(시천, 중산리)사람들과 북쪽지방(마천, 백무동) 사람들이 1년에 한차례씩 장날을 정해 서로 필요한 물건을 물물교환하던 해발 1750m에 위치한 지금의 장터목대피소 자리이다. 남쪽 사람들이 산정의 장터로 가는 길은 대개 덕산-중산리-장터목 또는 화개-세석-장터목 코스를 이용한 반면 북쪽 사람들은 마천-백무동-하동바위-장터목 길을 이용했다.
1971년 지리산에서 최초로 지리산 산장으로 세워졌고, 1986년 재건축하여 '장터목산장'으로 불렸다가 1997년에 현대식 건물로 건축하여 '장터목 대피소'로 부른다

[천왕봉(天王峰)]

지리산의 최고봉 천주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지리산의 웅대한 기상을 상징하고 있다..동서남북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거칠 것 없는 천왕봉정상에서의 전망은 장엄하기 이를데 없으며 특히 천왕봉에서 바라보는 석양낙조의 기관도 좋거니와 새벽동녘하늘가에 끝없이 펼쳐지는 구름바다의 운평선에서 떠오르는 천왕봉 해돋이의 장관은 천지개벽을 보는 것 같은 천하의 기관으로서 지리산 최고 명소로 꼽힌다...


 (동남능선 이야기)


[하봉]

지리산의 하봉은 낮다는 의미의 봉우리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나 결코 지리산에서 가장 낮은 봉우리가 아니다. 해발 1781m의 준봉인데도 하봉으로 불리는 까닭은 상봉인 천왕봉 바로 아래에 위치한 탓이라 여겨진다.


[중봉]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들 중에서 두번째 높은 봉우리가 바로 천왕봉과 마주하며 서있는 중봉(中峯·1875m)이다. 중봉은 수려한 산세와 울창한 원시림을 자랑하며 智異의 제일에 해당하는 선경을 간직하고 있으나 늘 천왕봉의 그것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조개골]

조개골을 따라 지리산 동쪽의 크고 작은 봉우리와 능선, 계곡, 재들을 찾아보는 산행도 의미있을 것이다. 특히 옛화전민들의 애환과 먼 옛날 가락국 마지막 왕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지리산 동쪽 자락은 우리 겨레의 역사적 현장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왕등습지]

왕등재의 역사적 의의와 함께 해발 1000m 지점에 대규모 늪지대가 있다는 사실도 왕등재의 신비함을 더한다. 너비 70m 가량에 2백여m 가량 길게 펼쳐진 왕등재의 늪. 사철 물기가 서려 나무는 한 그루도 자라지 못 하고 풀밭만 펼쳐져 있다. 물과 진흙 위에 펼쳐진 풀밭은 발목까지 질퍽거리게 하는 고산지대의 늪지대인 것이다. 왕등재 일원은 이 늪지대를 중심으로 또한 광활한 분지형 지대를 이뤄 마치 세석평전과도 흡사하다. 광활한 산상과 평원은 억새와 싸리나무로 뒤덮여 가을 분위기를 한층 더하고 있는가 하면 평원 저 멀리로는 천왕봉과 중봉이 우뚝 솟아 있어 색다른 운치를 자아낸다. 뿐만 아니라 평원 주변으로는 1030m 고지와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이 에워싸고 있는가 하면 북쪽으로는 왕산과 이어지는 지능선을 두고 있어 한층 더 신비감을 갖게 만드는 천연요새처럼 보인다.


[왕등재]

왕등재에 얽힌 구형왕 설화는 지리산에 들어온 구형왕이 왕등재에서 토성을 쌓고 항전하다 끝내는 왕산으로 쫓겨가 최후를 맞게 됐다는 구전이다.이를 뒷받침하는 흔적들로 외곡마을에서 왕등재로 곧장 오르다 보면 왕등재와 오른쪽 1030m 고지를 원형으로 둘러싼 토성이다. 토성은 외성, 내성을 겹으로 쌓았는데 원래 높이는 3m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성을 따라 남문·서문·북문이 적당한 간격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성문이 있던 곳만 석축을 쌓은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이러한 토성과 성문의 석축 흔적은 아직도 왕등재 일원에 남아 있다. 구형왕의 축성에 관한 구전은 왕등재와 함께 앞서 "국골"편에서 언급한 추성산성터에서 동시에 찾아볼 수 있다. 추성산성을 축조하고 국골에서 병마를 훈련했다는 구전을 뒷받침하는 것들로는 얼음터·두지터 등이다. 반면 왕등재의 사연은 왕등재 일원의 토성과 성문 흔적 이외에 왕등재 남쪽의 935m 고지의 깃대봉(군대의 깃발을 걸었다는 의미), 망을 보았다는 망덕재, 말을 사육했다는 망생이골 등이다. 결국 왕등재에 얽힌 구형왕의 사연을 살피면 왕등재를 궁으로 삼고 유평계곡 일원을 마지막 요새로 삼았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에서 볼 수 있듯 쑥밭재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두 곳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구형왕이 강력한 요새를 구축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4재 1고개]

지리산 동쪽 자락에는 유난히도 고개가 많다. 쑥밭재.새재.외고개.왕등재.밤머리재 마천과 유평을 잇는 쑥밭재·새재가 있으며. 금서와 유평을 잇는 외고개·왕등재·밤머리재 등 모두 5개나 된다. 이중 쑥밭재와 새재는 등산객들이 다소 찾아 보편화해 있으며 밤머리재는 지리산 동쪽 자락을 두동강 내는 포장도로가 열려 있어 생태계는 파괴됐지만 도로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반면 왕등재와 외고개는 아직도 그대로 수수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도토리봉]

도토리가 많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웅석봉]

해발 1099m. 곰바위 봉우리란 뜻의 웅석봉(熊石峰)이 험준한 산세를 지녀 곰까지 날카로운 바위에 떨어져 죽었다는 유래를 가질 정도이면서 천왕봉의 그 아름다움과 장대함을 수놓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천왕봉 바로 동쪽 코 앞에 위치해 있는 지리적 여건 때문이다.


[달뜨기능선]

웅석봉에서 밤머리재 가기전 삼거리에보면 딱바실골이란 이정표가 보입니다 이곳부터 1시간30분 가량 거리가  달뜨기 능선입니다 언제부터 누군가가 먼저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이병주님의" 대하소설 지리산에 빨치산이란 이름이 나옵니다 "동무들!저기가 달뜨기요" 달뜨기 능선은 동부능선이 끝나고 웅석봉에서 감투봉나 수양산 가는 사이의 평범한 길입니다 공비 토벌대의 공격에 살아남은 빨치산들이 치밭목이나 조개골 비트속에 숨어지내며 이곳  달뜨기능선에서 밤이면 떠오르는 커더란 달덩이를 보며 고향에 두고온 부모님생각에 가슴을 앓았다고 해서 달뜨기 능선이라 부릅니다 멀리서 보면 그져 평범한 능선이지만 고향에 두고온 고향산하와 너무도 닮았기에 숨어지내던 비트에서 얼마나 울었을지.........고향을 생각하나 갈수 없는 몸에 메여 지리산의 아흔아홉골을 무던히도 돌아다니던 그들도 달뜨기능선에서 꽉차오르던 달을 보며  품속에 꼭꼭 숨겨둔 어머니의 사진을 입술을 깨물며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을 하없이 그려본 능선이 이곳 달뜨기입니다. 품속에 숨겨둔  구겨진  어머니 사진엔 자신의 한없는 눈물자욱만 가득하고 고향산천의 한없는 그리움속에 한 맺힌 생을 맞이 하죠 "이현상'은 지리산에 들면 살길이 열린다했는데.....달뜨기능선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의 남부경사면은  검푸른 바다처럼 너무나도 광대하고 웅장 하며 어린 발치산들의 생존에 몸부림치던  눈물이 보일듯 합니다 한번은 가봐야 할 태극의 마지막 끝자락을 향하여..........


[딱바실골]

종이만드는 딱나무가 많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마을이름이라고 하네요


[덕산]

남명 조식(1501-1572)이 이름지은 곳이며  "덕을 쌓을 수 있는 땅"뜻으로 경남 합천에서 출생한 남명 선생은 같은해 태어난 퇴계 이황과 함께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