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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설흘산 "2011. 06. 19." 본문

경 상 도 산행

남해 설흘산 "2011. 06. 19."

지리산 독사 2011. 6. 25. 15:56

족적 : 선구마을--낙뇌산(171m)--첨봉--응봉산(472m)--설흘산(481m)--너덜지대--가천 다랑이마을

시간 : 4시간 10분 소요(넉넉한 산보 같은 걸음으로)

유래 : 설흘산(雪屹山) 유래는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흘산(所屹山) 봉수"라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지금은 설흘산으로 불린다. 설흘산 봉수대에 오르면 왼쪽에 앵강만이 보인다. 꾀꼬리 앵(鶯)자와 큰내 강(江)자를 쓰는데 알려진게 없다. 그러나 꾀꼬리 눈물바다라는 설이 있으며, 돌탑이 있는 응봉산은 매응(鷹)자를 쓴다는데 이유는 모르겠다

경남 민속자료 제13호로 지정된 암수바위는 남성의 성기와 임신한 여자의 배를 닮은 자연석이다. 숫바위는 높이 5.8m, 암바위는 높이 3.9m, 둘레 2.3m이다. 가천마을에서 매년 음력 10월 23일 풍년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를 올리고 있다 자녀가 없는 사람들은 자녀를 낳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암수바위 유래는 영조 27년(1751년) 이 고을의 조광진 현감의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내가 가천에 묻혀 있는데 그 위를 소와 말들이 지나다녀 견디기 어려우니 나를 파내어 일으켜 주면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현감이 노인이 지적한 현장으로 가서 현재의 암수바위를 파내어 세워놓고 논 다섯마지기를 제수답으로 주었다. 그래서 매년 음력 10월 23일제사를 지내오고 있는 것이다.

1920년 욕지도의 한 어선이 풍랑으로 가천 앞바다에 표류하게 되었는데 암수바위의 화신인 미륵노인이 나타나 구해준 뒤로는 '미륵바위'라는 이름이 또 붙게 되었고, 구출된 그 어부들이 평생을 암수바위에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설흘산 정상에 서면 동쪽 바다에 노(櫓 : 방패 노)처럼 생겨서 '노도'라는 작은섬 하나가 있다. 이 섬이 우리나라 최초 국문소설을 집필한 서포 김만중이 귀양살이를 하면서 사씨남정기를 저술했다고 한다.

후기 : 사무실의 업무로 심신이 피곤함에도 산이 나를 부르니 아니 갈 수 없어 섬에서 육지로 변한 남해 설흘산으로 향했다. 예전 휴가를 내고 남해를 다 다녔지만 그래도 가고 접은 것을 어찌하리.....! 누군가 이야기 했다. "힘들면 떠나라, 그리고 그곳에 힘든 것을 내려 놓고 오라"고 ... 말 그대로 칼바위 천길낭떨어지에 서서 긴 호흡 한 번으로 무거운 짐을 산과 바다에 던지고  막걸리 한잔에 행복과 즐거움과 웃음을 가슴에 담았으며, 함께한 가족같은 사람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짐을 내려 놓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다음주엔 또 어딜가나....!

 

 

수령 약 350년, 높이 14m로 남해군 남면 선구마을 보호수인 팽나무

초입에서 잠깐 오르면 등로 좌측에 위치한 바위굴 그러나 내부에 너무 더러웠다

 

 

 

 

칼바위 천길 낭떨어지 쳐다보니 오금이 저려온다 

칼바위 길에서 지나온 암릉을 뒤돌아 보며 감탄사 한 번 보내고

 

칼바위길에서 바라 본 것으로 우측에서부터 응봉산, 설흘산, 금산

첨봉에서 응봉산으로 가는 칼바위 등로 

칼바위 길에서 멀리 보이는 설흘산

칼바위 능선길은 좌·우측 바다를 즐기고 암릉에 취하다보니 지루함 없이 즐기는 산행이였다. 

 

응봉산에서 바라 본 가야할 설흘산과 그 너머 금산

설흘산에서 바라 본 지나 온 응봉산과 칼바위 능선

南海 雪屹山 烽燧臺

남해군 남면 홍현리 산237-1번지 위치한 남해 설흘산 봉수대는

해발 490m의 설흘산 정상에 자연암반을 기반으로 하여 석축된 것으로 평면은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하단부는 각이 있다.

규모는 높이 6m, 직경 7m, 둘레 20m로 조성 되었으며

이 봉수는 남해 금산 봉수를 받아 내륙의 망운산 순천 돌산도 봉수와 연결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 남쪽 해안방어와 관련된 관방시설로서 당시의 통신체제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학술자료로 인정되어

지난 2003년 6월 7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248호로 지정되었으며 2007년 2월 봉수대 주변을 복원정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상석은 이렇게 봉수대 위에 올려져 있다.

설흘산 정상에서 바란 본 응봉산에서 가천마을 하산코스인 육조능선

 금산과 노도

 우리나라 최초 국문소설을 집필한 서포 김만중이 귀양살이를 하면서 사씨남정기를 저술했다는 노도(중앙 섬)

하산 후 올려다 본 설흘산  

남해 가천마을 다랑이 논(명승 제15호)

 "다랑이 논"은 선조들이 산간지역에서 벼농사를 짓기위해 산비탈을 깎아 만든 인간의 삶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어 형성된 곳으로

 "가천마을 다랑이 논"은 설흘산과 응봉산 아래 바다를 향한 산비탈 급경사지에

곡선형태의 100여 층의 논이 계단식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배후의 높은 산과 전면의 넓게 트인 바다가 조화를 이루어

빼어난 농촌문화 경관을 형성하고 있어 경관적(예술적)가치가 뛰어나다

가천마을의 유래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없으나 대대로 마을에서 살아온 김해 김씨, 함안 조씨 가(家)에 전해오는 자료로 미루어 볼 때

신라 신문왕 당시로 추정되어지고 있으며, 미륵전설과 대한전설이 고려시대 이전에 삶이 시작되었고,

400여년 전에 일어난 임진왜란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는 설흘산 봉수대는

이미 그 이전에 이곳 가천마을에 집단적으로 거주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전해오는 마을의 옛 이름은 간천(間川)이라 불리어 왔으나 조선 중엽에 이르러 가천(加川)이라고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2년 농촌진흥청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되었다

논, 산림 및 바다의 자연적 요소와 가천암수바위, 밥무덤, 설흘산 봉수대,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인 노도(섬)와 같은 문화적 요소는 명승적 가치를 한층 높이고 있다.

다랑이 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