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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없는 남암산으로 간 여름 소퐁(2018. 8. 1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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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없는 남암산으로 간 여름 소퐁(2018. 8. 11)

지리산 독사 2018. 8. 13. 16:27


능소화

꽃말은 명예, 영예이며, 아마 이것은 이 꽃이 양반집에서나 볼수 있는 과거의 모습과 관련이 있는듯 합니다.

능소화는 중국이 고향인 능소화과의 덩굴성 목본 식물로, 중국에서도 강소성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 나라에는 수입 꽃이 되지만 들어온 때가 언제인지 까마득하고

동양적인 정서가 같아서인지 능소화는 우리 꽃처럼 느껴진다.

옛날 우리 나라에서는 이 능소화를 양반집 마당에서만 심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혹 상민의 집에서 이 나무가 발견되면 관가로 잡아가 곤장을 때려 다시는 심지 못하게 엄벌을 내렸다.

그래서 이 능소화의 별명이 양반꽃이라고도 하며 지역에 따라 금등화로 부르기도 한다.

 

능소화 이야기

이 꽃을 ‘구중궁궐의 꽃’이라 칭하는 이유가 있는데 이야기를 풀어 볼까나.
옛날 옛날 복숭아 빛 같은 뺨에 자태가 고운 ‘소화’라는 어여쁜 궁녀가 있었다.

임금의 눈에 띄어 하룻밤 사이 빈의 자리에 앉아 궁궐의 어느 곳에 처소가 마련되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임금은 그 이후로 빈의 처소에 한번도 찾아 오지를 않았다.

빈이 여우같은 심성을 가졌더라면 온갖 방법을 다하여 임금을 불러들였건만 아마 그녀는 그렇지 못했나 보다.

빈의 자리에 오른 여인네가 어디 한 둘이었겠는가?

그들의 시샘과 음모로 그녀는 밀리고 밀려 궁궐의 가장 깊은 곳 까지 기거 하게 된 빈은

그런 음모를 모르는 채 마냥 임금이 찾아 오기만을 기다렸다.

혹시나 임금이 처소에 가까이 왔는데 돌아가지는 않았는가 싶어 담장을 서성이며 기다리고, 발자국 소리라도 나지 않을까

그림자라도 비치지 않을까 담장을 너머너머 쳐다보며 안타까이 기다림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 기다림에 지친 이 불행한 여인은 상사병 내지는 영양 실조로 세상을 뜨게 되었다.

권세를 누렸던 빈이었다면 초상도 거창했겠지만 잊혀진 구중궁궐의 한 여인은 초상조차도 치루어 지지 않은채

‘담장가에 묻혀 내일이라도 오실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라고 한 그녀의 유언을 시녀들은 그대로 시행했다.

더운 여름이 시작되고 온갖 새들이 꽃을 찾아 모여드는때 빈의 처소 담장에는 조금이라도 더 멀리 밖을 보려고 높게,

발자국 소리를 들으려고 꽃잎을 넓게 벌린 꽃이 피었으니 그것이 덩굴로 크는 아름다운 꽃 능소화다

▲ 2


▲ 남암산 유래

천광무(光武) 3(1899)판 읍지에는 남암산을 김신기산(金信基山)이라 하였으니

옛이름을 그렇게 불러온 것으로 보아진다.
김신기산이라고 한 유래를 고찰하여 보면 신라말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儆順王) 때의 일이다.
경순왕은 백척 간두에 선 나라의 장래를 영축산의 문수대성(文殊大聖)의 계시를 받아 결정키로 결심하고

타자와 둘째 왕자를 거느리고 하곡현(河曲懸)의 영축산을 찾아 길을 나섰다.

먼저 太和寺에 이르러 참배하고 또 길을 나섰는데 중도에서 길가에 한 동자승(童子僧)이 나타나더니

대왕께서 오실 줄 알고 산으로 인도하여 모시고자 왔다고 고하였다. 왕은 다행히 생각하고 크게 만족하여 길을 따랐다.
그러나 삼호(三湖)앞에서 太和江을 건너자 얼마가지 아니하여 동자승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왕은 직감에 이 동자승이 문수보살임을 느끼고 하늘은 이미 나를 저버리는구나 하여 크게 탄식하며

이제는 할 수 없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는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이래서 왕은 발길을 돌려 월성에 환궁하여 사방의 땅이 다 타인의 소유로 돌아가고

나라의 힘은 약하고 쇠퇴하여 다시 일으키지 못함을 통탄한 나머지 고려태조에 항복하기를 꾀하였다.
이때 군신들의 의논은 제각기 찬반이 엇갈렸다.
왕자 痲衣太子는 말하되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는 법, 오직 나라 사랑하는 여러 충신들과 함께

민심을 크게 수습하여 나라를 굳게 하다가 힘이 다한 연후에야 말할 것이나

어찌 1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쉽사리 다른 나라에 내 줄 것이랴"하였다.
왕이 한숨지며 말하되"외롭고 위태함이 이와같아 형세는 이미 능히 온전할 수 없으니 이왕에 강하지도 못하고

또 약하지도 못하여 무죄한 백성들을 참혹히 죽게 하는 것은 내 차마 하지 못하는 바라"하고

고려에 국서를 보내어 귀부를 청하고 말았다.

왕자는 통곡하며 왕을 하직하고 곧 개골산(皆骨山-金剛山)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마의(痲衣)와 초식(草食)으로 그 생을 마치었다
또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華嚴宗)에 들어가 중이 되니 이름을 범공(梵空)이라 하고

법수(法水) 海印寺에 머물다가 文殊山 남쪽 산에 절을 지어 여기에서 살았으니

그 절 이름을 김신암(金信庵)이라 하였다.

이 절은 정조 10(1780)판 읍지를 보면 <문수암>남쪽 3리에 있는데

신라왕의 소창이라 하여 그때까지는 절이 실존하였다.
그 절로 말미암아 그 산명을 김신기산(金信基山)이라 불러 오다가 지금은 남암산(南巖山)이라 한다.
또 이 절에는 김신대(金信台)를 만들어 풍류를 즐기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자료출처>   울산지명사   -울산문화원 편찬-

▲ 남암산, 산행 인원이 8명인디 한명은 꼭 안보입니다.

▲ 남암산 아래 데크 전망대에서 점심 후 한 컷,. 여도 7명 ㅋㅋㅋ

▲ 청송사지 삼층석탑

이 탑은 청송사터에 기단 일부가 파손된 채 묻혀 있던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3층 석탑이다.

1962년 이 탑을 해체, 복원할 때 상층기단에서 청동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사리함 안에는 청동여래입산 1점을 비롯하여 유리, 수정, 옥 등 30여점의 유물이 들어 있었다

상하로 나뉜 2중 기단 위에 5.5m 높이의 3층 탑신이 올려졌다

1층 탑신이 지나치게 큰 반면, 옥개석의 처마는 짧은 편이며 옥개석은 모두 5단 받침으로 되어 있고

상륜부는 없어졌다, 통일신라시대 지방 석탑의 양식을 보여주는 주요한 유적이다

청송사 특징

청송사의 창건연대에 대해서는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 전혀 없다

따라서 역사학자들은 단지 현존하는 탑의 모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형식을 갖추고 있어  이 절 역시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탑의 특징은 쌍탑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현재 한 개의 탐만 남아 있다 그러나 인근에 또 다른 탑편이 발견되고 있어 창건당시부터 한 개의 탑이 아니고 다른 탑이 있었지만 그 동안 모두 훼손되거나 옮겨져 묻힌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절의 규모를 말할 때 옛 사람들은 10방 15암자라 하였는데 이는 청송사가 법당이 10개나 되고 15개의 암자를 거느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탑도 당초 7개 있었는데 이중 6개는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이 무너뜨린 후 다른 곳에 버렷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자료는 제가 청송사 거사림 활동 당시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 남암산에 설치된 문수산, 남암산 등산 안내도

《 발자취 》

2018. 8. 11.(토) 09:20 ∼ 14:20 --- 5시간 소요(시간 무의미)

청송마을회관 - 구 인연암 - 마당재 - 남암산 - 청송자연농원 갈림길 - 청송사 - 청송마을회관...약 6.5km

허리가 아프지만 좋은 사람들과 가까운 남암산 산행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우정산그리뫼 산악회 임원진 대거 참석으로 8명의 대군으로 산행을 했으며

거리는 짧으나 바쁠 것 없고, 좋은 사람과 함께하니 하늘도 감탄하여 시원한 바람을 보내주었고

복희야님 입담이 하루종일 웃음이 떠나질 않았으며

막걸리 한 잔으로 속이 안좋아 하루종일 고생하면서도 복희야 형님의 입담을 웃으며 다 받아주신 만추형님

8월 계곡이 없는 남암산 산행이 시원한 계곡산행 같은 산행이 되었네요

▲ 파란 실선으로 한바퀴

▲ 마당재까지 오르면서 막걸리 한 잔 하다보니 사진에도 웃음이....!

     

▲ 항상 사진에는 7명이라 요렇게 나누어서 ㅋㅋㅋ

▲ 전설이 있는 정상에서 자연스런 포즈 조으네요

▲ 남암산 정상에서 꿈의그린 님이 가져 온 약초 술로 목을 축이고 꾸바 하로 갑니다.

▲ 2

▲ 약초 술 머라켔는데 이자뿟어요

      

▲ 꼭 1명이 안보여서 이렇게....!

▲ 탁님, 뒤에 뉘신지...

▲ 남암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좌측 문수산, 우측 영축산, 그리고 멀리 국수봉과 치술령이 조망된다

▲ 남암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울산시가지와 뒤로 무룡산, 좌우로 울산어울길이 펼쳐져 있다

▲ 남암산 전망대에서 발본 울산 공단지역, 구름이 하늘을 가렸으나 멀리까지 보여줍니다.

▲ 탁배기님

▲ 자화상

요기만 내려가면 오늘의 만찬이 펼쳐집니다.

▲ 데크 전망대에서 멋진 점심을 준비합니다.

      

▲ 다들 젓가락 들고 준비...!

     

▲ 요렇게 굽고

     

▲ 요렇게 볶고 삶고

                                

▲ 좌는 떡뽁기 우측은 라면 끼리고

우예 다 먹었는지....술도 쪼매 모라릿는데  

▲ 점심 후 한 컷

또 7명이네요...사진이 너무 어둡게 나와 반 흑백으로 만들었어요

▲ 첫번째 청송자연농원 갈림길은 그냥 지나가고

▲ 두번째 청송자연농원 갈림길에서 자연농원으로 향합니다.

▲ 요거이 먼 열매인지..호미회장님 따 먹었는데....!

▲ 청송사로 향하면서 무신 할말이 그리 많은지 한 번도 쉬지 않네요

▲ 청송사지 3층석탑과 뒤로 청송사(靑松寺)

청송사는 울주군 청량면 율리 청송마을에 위치했던 절로서 다만 신라 때의 절이라고 전해올 뿐

남긴 문헌이라고는 없다.  단지 보물 제382호로 지정된 청송사지 삼층석탑과 지방문화재인 부도가 남아있을 뿐

절터였던 곳에는 인가가 들어선 작은 마을로 변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올라 있는 절이였다는 것을 본다면 울산지방의 주된 절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절은 망해사와 마찬가지로 순조 31년본 울산부읍지에는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나

광무 3년본 읍지에는 없어졌으니 그 사이에 폐사된 것으로 보아진다.

임진왜란때 의병장 서몽호의 군이 선조 25년(1592) 12월초부터 한동안 문수산에 둔진하였을 때

청송사는 군량을 저장하고 있었다

이 자료는 제가 청송사 거사림 활동 당시에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 청송사지 3층석탑을 지나 조금만 내려가면 청송마을회관인데 아직도 즐거움이 가득합니다.

▲ 청송마을회관에 주차해 둔 애마 2대를 만나 오늘 산행을 마무리 했다

그러나 산행이라기 보다는 우정산그리뫼 운영진 단합대회ㅋㅋㅋ

같이 한 님들이 다 같은 마음이라 정말 편하고 좋은 추억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