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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류록" 따라간 『지리산 동북부 폐칠암자』 산행 1부 "2019. 11. 16" 본문

지 리 산 산행

"유두류록" 따라간 『지리산 동북부 폐칠암자』 산행 1부 "2019. 11. 16"

지리산 독사 2019. 11. 22. 01:47

 

▲ 산죽비트 전 계곡에서 만난 멋진 단풍, 같은 나무에 가지마다 색깔이 조금씩 달랐다

    2019년 가을단풍은 요것을 끝으로 단풍은 내년으로 기약해야 것다

 

환희대 자화상

   이 바위가 점필재 김종직의 기행문 유두류록에 환희대라고 추정되는 망바위다.

   유두류록에서 환희대는 천길이나 되는 곳으로 그곳에 오르면 홍련사, 백련사 등 여러 사찰이 보인다고 했다

   세상이 수 십번 변했는지는 몰라도 아무리봐도 천길은 아니였다

 

▲ 의론대에서 바라본 함양독바위,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형상을 보여준다

    함양독바위

    동부능선 상 독바위 앞에 '함양'이라고 붙은 것은 지리산에 3개의 독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남부능선 상에 있는 하동독바위, 또 하나는 쑥밭재와 새봉 사이에 있는 산청독바위와 구별하기 위함이다. 홀로 외로이 서 있다하여 홀로 독(獨)자를 쓰기도 하고 장독모양을 닮았다하여 옹암(甕岩)이라 부르는 곳도 있다

    유두류록에 함양독바위를 '독녀암'이라 기록해 놓았는데 한 부인이 바위 위에서 돌을 쌓아 거쳐를 만들고 그 안에서 득도하여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어 그렇게 붙었다 한다 

 

▲ 함양독바위, 이곳에서 우측 바위를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다

 

▲ 안락문 단체 한 장

 

▲ 자화상

▲ 발자취

 

                      ▲ 동북부 폐칠암자 산행지도

 

               ▲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 안내도

▶ 언   제 : 2019. 11. 16.(토) 08:01 ~ 16:27 .... 8시간 25분 소요

▶ 어   디 : 한쟁이골입구 - 적조암 - 박쥐굴 - 지장사터 - 암자터 - 환희대 - 선열암사거리 - 선열암 암자터(왕복) - 유슬이굴 암자터 - 선녀굴사거리 - 선녀굴 암자터(왕복) - 의론대 - 고열암 암자터 - 신열암 암자터 - 함양독바위 - 안락문 - 1.190봉 - 장군봉 - 금낭굴 암자터 - 상대날등 - 한쟁이골 입구 ... 약 10.77km(원점회귀)

▶ 누구와 : 백두대간 산우 6명

▶ 지리산 동북부 폐칠암자 순례는 조선 성종때 점필재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있던 시절 지리산 유람을 하고 남긴 "유두류록"의 첫날 산행 일정을 따라가는 것이다.

1472년 음력 8월 14일 함양을 출발하여 엄천강을 건너 화암, 지장사, 환희대, 선열암, 신열암, 함양독바위를 지나 고열암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이후 천왕봉을 거쳐 함양관아까지 4박 5일간의 김종직 산행기 "유두류록(두류는 지리산의 옛지명)"을 근거로 산꾼들에 의해 답사되기 시작했으며 함양군에서 이정표를 만드는 등 등산로가 있었으나 국립공원에 속해지면서 모든 것이 철거되고 출입이 통제되었다

세월의 흐름 탓인지 폐암자터에는 깨진 기와장, 그릇, 석축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빨치산 활동의 근거지 흔적이 남아 있는 칠암자 순례산행을 하여보니 폐칠암자 모두 명당터임에는 분명한듯 하였다

 

▲ 한쟁이골입구 부근에 차량을 주차하고 적조암 방향으로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 올라간다

 

▲ 펜션과 민박촌이 있는 해동검도 무술원을 지난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물라도 찬기운과 함께 계곡의 시원한 물소리가 오늘 폐칠암자 순례산행을 설레게 하였다

 

▲ 적조암, 하산길은 상대날등이라 적조암을 지나치기 때문에 적조암은 잠시 눈팅만 하고 올라갔다

 

▲ 이곳 새마을지도자집 좌측 등로를 따라 계곡을 좌측으로 끼고 오른다

 

▲ 산죽비트 전 이곳 계곡에서 잠시 쉬면서 물을 보충하고 계곡을 버리고 좌측으로 진행 박쥐굴을 찾아간다

 

▲ 한참을 오르니 이런 넓은 반석이 나타난다. 이제 이곳에서 3분여만 오르면 첫번째 목적지인 박쥐굴이다

    숲이 우거진 여름이면 폐칠암자를 찾아다니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 박쥐굴의 산우들

 

▲ 박쥐굴 자화상, 박쥐굴 뒷쪽으로도 뚫려 있었다

 

 

▲ 박쥐굴 앞의 넓은 공터, 이곳은 암자터는 아니지만 그래도 무언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 지장사 터, 칠암자 중 유일하게 "사"자가 붙은 곳으로 절의 규모가 컸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래서인지 주변은 상당이 넓었으나 지금은 나무와 덩쿨이 엉켜 그 넓은 흔적을 찾기가 힘들었다

▲ 좌)는 나무와 덩쿨이 엉킨 지장사터  우)는 지장사터의 깨진 기와장

 

▲ 지장사터에서 암자터로 가면서 등로를 약간 벗어나서 만난 잔나비걸상버섯

    내가 직접 채취한 버섯 중에는 제일 큰 것이였다

 

▲ 지도상에 암자터인데 바위 아래 큰나무가 자란 넓은 터지만 그 흔적은 찾을 수 없다

 

▲ 환희대를 찾아가던 중 만난 죽은 듯 살아 있는 나무, 소나무도 아닌데 누가 왜 이렇게 껍질을 벗겨 놓았을까?

    버섯을 채취하려고 .....이건 아닌것 같은데..............!

 

▲ 환희대를 찾아가던 중 만난 기도터, 좌측 천막은 고로쇠 집합소였다

 

▲ 무당들이 이곳에 와서 기도를 하는 곳인것 같았다

 

▲ 희미한 길을 따라 환희대를 찾아가는데, 낙엽이 푹신푹신하여 스틱이 있어도 상당히 미끄러웠다

 

▲ 삼각형 모양의 바위가 있는 저곳이 환희대다

 

▲ 큰 암반 위에 요상한 바위가 올라 앉아 있다

    저곳에서 삼각형 모양의 바위에 올라갈 수 없어 다시 내려와 좌측으로 돌아서 올라 갔다 

 

▲ 이곳이 환희대 정상부, 6명이다보니 나는 항상 빠진다

 

▲ 환희대를 지나 이곳 황새날등, 선열암 사거리에서 베낭을 벗어두고 좌측으로 약 100m거리에 있는 선열암 암자터를 찾아간다

 

▲ 큰바위 위에 이끼와 고목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보니 꼭 미지의 정글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든다

    우리 일행은 살며시 구경만 하고 지나친다

 

▲ 선열암 암자터

    하늘향해 솟은 높은 바위 아래가 선열암 암자터였다

    절벽 아래 두 샘이 있었다고 하는데 찾아도 보이지 않는것으로 보아 세월의 지나 묻힌 것으로 보인다

 

▲ 선열암 암자터의 깨진 기와장과 하늘 향해 솟은 암벽으로 보아 이곳도 범상치 않은 암자터 였음을 보여준다 

 

▲ 선열암 암자터

    이곳에서 다시 황새날등인 선열암사거리로 되돌아가 유슬이굴 암자터로 간다

 

▲ 유슬리굴 암자터

    다래넝쿨과 잡목들이 엉켜 있는 덤불속에 삼각형 모양의 석굴이 유슬이굴이다.

    이곳은 유씨성을 가진 어느 사람의 기도터라서 유슬이굴이라고 했다는데 주변에 이끼 묻은 기와장과 항아리 파편들이 널여 있어 암자터였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 유슬이굴 내부에서 바라본 외부 모습으로 다래넝쿨과 잡목이 입구를 막고 있는 것 같다

 

▲ 유슬이굴의 깨진 기와장과 항아리

 

▲ 선녀굴로 가는 지점에 앞서간 산꾼들이 바위틈에 만들어 놓은 샘에서 물 한모금하고 선녀를 만나러 간다

 

▲ 올려다 본 함양독바위가 점점 가까워지는데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이 달라진다

 

▲ 속이 빈 아름드리 나무,  하루종일 폐암자를 찾아다니다 보니 요상하고 괴이한 나무를 많이 만났다

 

▲ 선녀와 나뭇꾼의 전설이 깃든 선녀굴

    선녀굴은 예쁜 이름과는 달리 한국전쟁의 비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빨치산 정순덕이 지리산에서 최후의 3인 부대로 떠돌던 중 3인중의 한 사람인 이북출신의 남파 공비인 이은조가 사살된 현장이다. 1961년 12월 어느날 아침 토벌대의 공격으로 이은조가 사살되자 정순덕과 이홍희는 이은조의 시체를 선녀굴 석간수 바로 앞에 매장을 했다고 한다

 

▲ 선녀굴

 

▲ 2

 

▲ 선녀굴 석간수

 

▲ 선녀굴에서 솔봉능선으로 되돌아와 오른 의론대

    저 소나무는 흙도 없는데 어떻게 살고 있는지...아마도 나보다 나이가 많을 것이다.

 

▲ 의론대

    예전에 절벽아래 석굴이 있었는데 그곳에 기거하든 노숙 우타가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3암자의 중들과 이 삼반석에서 대승, 소승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우쳤다고해서 이곳을 의론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의론대(議論) :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승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이 있는데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그곳에 거쳐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3암자의 중들과 함께 이 반석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이렇게 호칭한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 의론대에서 바라 본 함양독바위

 

▲ 고열암 암자터

    고열암에 자다 ......김종직의 유두류록 중에서

    병든 몸을 지탱하고자 하여 / 잠시 포단을 빌려 깔고 자는데

    소나무 파도가 달빛아래 들끓으니 / 그곳에 노니는 듯 착각케 하네

    뜬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고 / 한밤중엔 바위 골짜기 닫혀 있구나

    오직 정직한 마음을 가진다면 / 혹 산신령이 비록을 얻을는지

 

▲ 고열암 암자터는 점필재 김종직 일행이 산에 들어 첫날밤을 지낸 곳이다

    다른 암자터와는 달리 바위가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는 것이 특이하였다 

 

▲ 고열암 암자터에 약 1시간에 걸쳐 김치국밥으로 점심을 먹고....

 

▲ 이렇게 단체사진 한 장 남기고 신열암 암자터로 향했다

2부로 이어집니다.